김석기-인도 뭄바이(Mumbai)- 마하트마 간디의 집을 찾아서


동문특별강좌 김석기-인도 뭄바이(Mumbai)- 마하트마 간디의 집을 찾아서

작성일 2013-12-16
▲김석기(미교67, 동양수묵연구원장)

인도 건국의 아버지라 불리는 민족 지도자 ‘마하트마간디’가 살았던 집을 찾았다. 아담하게 지어진 3층 건물로 서민적이고 고전적인 분위기다. 간디의 집으로 들어서니 간디의 반신 동상이 인자한 표정으로 반긴다. 그의 서재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그가 썼던 방안에는 아직도 물레와 생활도구들이 그대로 나란히 놓여있다.

1922년 간디를 방문한 인도의 문호 R.타고르는 ‘위대한 넋’이라는 뜻을 가진 ‘마하트마’라는 이름을 간디에게 붙여 주었다. 간디의 본명은 ‘모한다스카람찬드간디’ 이다.

간디는 인도 서부 포르반다르에서 태어났다. 1887년 18세 때 런던에 유학하여 법률을 배우고, 1891년 귀국하여 변호사를 개업하였다. 1893년 소송사건을 의뢰받아 부인과 함께 남(南)아프리카 연방의 더반으로 건너갔다. 그 곳에 이주해 와 살고 있는 7만 명 인도사람들이 백인의 박해를 받고 있는 사실을 알고 간디는 인도인의 지위와 인간적인 권리를 보호하고자 남아프리카 연방 당국의 정책에 반대하는 인종차별 반대투쟁단체를 조직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영국은 인도사람들을 전쟁에 동원하였다. 인도인들은 전쟁참여 조건으로 완전독립을 약속 받으려 하였으나 타결을 보지 못하게 되자 영국의 즉시 철퇴를 요구하며 대규모 반영불복종운동에 돌입하였다. 이로 인해 간디는 73세의 노령으로 다시 체포되어 1년 9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1947년 7월 인도가 분할 독립했을 때, 간디의 나이는 78세였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그는 종교 갈등을 빚고 있던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융합을 위한 조정 활동을 계속하였다. 1948년 l월에도 그는 뉴델리의 종교 갈등 문제를 진압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반(反)이슬람 극우파의 한 청년의 총탄에 의해 쓰러지고 만다.

그는 그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세계의 모든 나라가 다 반대를 하고, 온 인도의 국민이 다 나를 잘못이라 하더라도 나는 일어서련다. 인도를 위해서 또 세계를 위해서 말이다. 나도 지금 우리나라가 순수한 비폭력의 정치 불복종 운동을 하기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군사가 준비되지 않았다고 하여 도망가는 장군이 있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포기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내게 가장 귀한 비폭력의 무기를 주셨다. 만일 내가 오늘의 위기에서 그 위대한 무기를 쓰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나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간디의 집을 나서면서 다시 한 번 위대한 지도자의 일생을 되돌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