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광-나꼼수와 '팬덤'


동문특별강좌 이택광-나꼼수와 '팬덤'

작성일 2012-02-09
▲이택광(모교 외국어대학 교수)

<나꼼수> 진행자들의 여성비하 발언을 문제 삼는 논란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2008년 촛불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여성전용 ‘삼국카페’ 회원들이 성명서를 발표하고 관망하던 이들도 여기저기에서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이러저러한 저간의 사정이 있지만 여기에서 한정해 생각해봐야 할 것은 나꼼수에 대한 팬덤의 문제이다. 사실 나꼼수 진행자들이 처음 문제가 불거져 나왔을 때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사태를 이렇게 키우게 된 것도 팬덤에 너무 기댔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애초에 문제가 되었던 것은 ‘비키니 사진’이 아니었다. 그럼 무엇이 문제였던가? 사진이 올라오자 ‘시위’라는 취지에 걸맞지 않은 성적 농담들이 굴비 두름처럼 주렁주렁 달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물론 여기까지 그럴 수 있다고 칠 수 있다. 평소에도 나꼼수가 내뱉는 성적 농담을 유쾌하게 즐기던 팬들이 아닌가? 자발적으로 사진을 게재한 것이고 나꼼수 팬들의 특성상 ‘발랄하게’ 응대를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나꼼수 진행자들이 여기에 동조하면서 일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도 나꼼수 팬덤 외부에 있는 이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바깥으로 불만의 목소리가 전해졌고 공지영씨가 트위터에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이때 처음으로 공지영씨가 ‘사과’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공지영씨가 말한 ‘사과’는 비키니 사진 게재 자체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시위’의 본분에 어울리지 않는 일부 팬들의 행동에 동참해버린 나꼼수 진행자에게 주의를 환기시키는 정도였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런데 열성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사과’라는 표현을 물고 늘어지면서 성개방성의 문제로 사건을 비화시켜버렸기 때문이다. 내부의 의사소통 문제가 졸지에 성에 대한 태도를 기준으로 진보와 보수가 나뉘는 사태로 변질된 것이다. 흥미롭게도 잘못한 것이 없다는 입장을 가진 팬들은 그렇지 않은 입장을 가진 이들보다 자신들이 훨씬 진보적이고 개방적이라고 믿는 것처럼 보이는데, 결과적으로 진보의 가치와 양립할 수 없는 마초주의를 정의를 위해서 옹호하는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이 상황은 과거 심형래 감독의 영화 <디워>를 둘러싸고 벌어진 모양새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사태를 냉정하게 분석하면서 합리적 해결책을 내놓는 지식인들은 나꼼수를 음해하려는 불순한 집단으로 간주되어 배척당한다. 오히려 비합리적인 팬덤이 자기방어의 논리를 만들어내면서 자신을 ‘다수의 상식’이라고 주장하는 일이 반복해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 팬덤의 긍정성에 동조하는 일부 지식인들이 갖가지 궤변을 엮어내는 광경도 참으로 닮은꼴이다.

누구는 이명박 정부의 잘못이나 더 지적하라는 비아냥거림을 날리기도 하지만 지금 더 심각한 문제는 레임덕에 빠진 이명박 정부가 아니라 현재에도 있고 미래에도 있을 팬덤의 양상이다. 정치가 시비를 가리는 토론이라면 팬덤은 피아를 구분하는 믿음이다. 토론이 실종되고 믿음만이 남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지난 4년간 독특한 대통령의 정신세계를 통해 똑똑히 실감하지 않았는가? 합리적인 비판을 감정적인 욕설로 간주하는 태도의 원인이 이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사건은 한국 사회에서 정치의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현상이다. 팬덤이라는 취향의 문제가 정치로 자동 번역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가 이 사건의 교훈인 것이다. 정치전망이 아니라 팬덤에 의존해 자기세력의 이익 관철에 급급한 정치인들은 이 교훈을 다시 한번 새겨야 할 것이다.

[2012.2.8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