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특별강좌
김종회-사람됨이 관건이다
▲김종회(국문75, 모교 문화홍보처장, 총동문회 이사)
신정아씨의 자전적 기록 ‘4001’로 연일 온 나라가 시끄럽다. 이 책으로 인해 두 번 죽는 사람도 생기고 사실 여부를 떠나서 전직 총리는 할 말을 잃게 됐다. 신씨 본인은 얼마나 자기 카타르시스가 수행되었는지 몰라도,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는 일이 결코 편안할 리 없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사건과 관련된 인물 모두가 자신을 피해자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반성적으로 성찰하는 분위기가 없다는 점이다.
유사한 사례가 1996년에도 있었다. 이른바 린다 김 사건인데, 그를 로비스트로 고용한 미국 응찰업체가 백두사업이라는 국방부 무기 도입에 최종 사업자로 선정되었다. 그 과정에 린다 김은 부적절한 관계를 이용해 고위 인사들에게 로비했고 당시 국방장관은 그것을 시인했으며, 애정고백의 편지까지 공개되었다. 아무리 죄가 무거워도 최소한의 위신과 더불어 감추어져야 할 것이 있다면, 이는 내밀한 마음의 움직임이요 그 속에 담긴 ‘인간’일 터이다. 린다 김과 신정아는 이것을 지키지 못했다.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채택(蔡澤)은, 연나라 사람으로 고향에서 불우하게 살았으나 진나라 재상으로 크게 출세한 인물이다. 그는 재상 범수(范?)에게, 공을 세운 후에는 물러나는 것이 최상의 도라고 설득하여 사퇴하게 한 후 다음 재상이 되었다. 나중에 그도 스스로 물러나 평안한 말년을 보냈다. 달도 차면 기운다는, 월만즉휴(月滿則虧)는 바로 그의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열전’ 가운데 범수채택열전(范?蔡澤列傳)에는, 범수와 채택 두 사람의 이야기가 대화체를 빌려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채택이 입신하기 전 벼슬을 얻으려 제후들을 찾아다녔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당대의 소문난 관상가 당거(唐擧)에게 갔는데, 당거는 ‘코가 낮고 어깨는 높이 솟았으며 이마는 튀어나오고 다리가 휘었다’며 좋은 말을 하지 않았다. 채택은 남은 수명을 묻자 당거는 43년이라 대답했다. 채택은 그로써 족하다고 생각하고 거리낌 없이 스스로의 길을 갔다. 그의 출세와 노년의 안락을 염두에 두고 보면, 인간의 지혜와 통계학으로서는 알 수 없는 보다 근본적인 어떤 것, 곧 굳건한 마음의 바탕이 운명을 극복한 사례를 목도하는 것 같다.
이 열전의 말미에 사마천은 이렇게 적었다. ‘선비는 우연히 때를 만나는 경우가 있다. 이 두 사람 못지않은 재능을 가지고도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사람은 수 없이 많다. 그러나 이들도 어려운 때가 없었다면 떨치고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마치 나라가 부서져 산하를 떠돌았던 두보가, 그러므로 절편의 방랑시들을 남길 수 있었던 사실과 유사하다. 거기에다 채택은, 마음의 됨됨이도 좋았지만 결정적으로 중요한 때에 욕심을 비울 줄 알았다.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많은 사람이 얼마나 많이 소탐대실의 우를 범하며 그로 인해 천추의 한을 남겼는지, 그 예증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
이 함정에 침몰되지 않는 힘은, 결국 관상의 예정론을 넘어서는 심상(心相)의 진실성에 있다는 뜻이 된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수많은 원칙과 제도들이 외형의 성과를 중시하고 그 내면의 사람됨을 경홀히 대하는지 알 수 없다. ‘인사는 만사’라지만 그 인사를 공정하고 균형 있도록 객관적으로 운용하는 경우는 드물다. 특히 파벌주의나 관계성에 이끌린 결정을, 오히려 인정과 인간미가 있는 처사로 수긍하는 한국적 풍토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21세기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는 물질문명의 첨단이 그 편의성이나 오락성을 앞세워 아무리 광범위하게 우리 삶의 현장을 점령하고 있다 할지라도, 궁극적으로는 자발적 의지에 바탕을 둔 건실한 사람됨의 문제를 간과하고 넘어갈 길이 없다. 올곧은 사람됨이야말로 인생의 마지막 결산에 있어서 가장 값비싼 자산이요 최후의 보람을 담보하는 통로이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자주 이 간단명료한 원리를 망각하고 사는지 모른다. 우리 사회의 갈등과 분란을 불러오는 모든 요인은, 대개가 삼척동자도 알고 있는 이 기본을 외면하거나 경시하는 데서 발생한다. 그러기에 지금은 다시 채택의 자기관리와 금도(襟度)가 말하는 ‘사람’의 숙제를 되새길 때이다.
김종회 문학평론가 경희대 교수
[2011. 3. 28 국민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