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특별강좌
신봉승-임금이 혼자 일 다하면 신하는 눈치만 본다
▲신봉승(국문57, 극작가, 총동문회 이사)
정조(正祖) 1년 2월 1일, 야대(夜對·밤에 하는 경연)에서 정조가 경연관들에게 물었다.
“당나라 때 군대를 거느린 신하 가운데 적격자가 없었던 것이 아니었는데 싸우기만 하면 패배하였으며, 아홉 절도사(節度使)들도 일시에 패배하기에 이르렀으니 그 연유가 무엇이냐?”
시독관 이재학(李在學)이 대답하였다.
“임금의 의심에서 연유된 것이옵니다.”
검토관 이유경(李儒慶)도 같은 뜻의 말로 용사(用事·신하를 등용해 쓰는 일)가 잘못되었음을 부연하였다.
“소인을 용사하였기 때문에 군사에 관한 것을 생각하지 못했을 것으로 압니다.”
두 신하가 사람을 등용하는 인사가 잘 못된 결과임을 간곡히 진언하는 데도 정조는 나름대로 자신의 소신을 피력한다.
“아무리 소인(小人)을 기용하였다고 하더라도 3년 동안의 전투에서 어떻게 한사람도 공을 세우지 못했을까. 여기에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을 것이다. 임금이 사람을 기용하는 방도는 먼저 신중히 가려야 하고, 또 임명한 뒤에는 의심하지 않은 연후에야 공과를 책임지울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황제는 장수를 싸움터에 보낸 뒤에 내시로 하여금 뒤를 살피게 하여 동정을 엿보게 한 것이 첫 번째 패인이다. 그 다음으로는 군사상의 일은 장군이 주관한 연후에야 통령(統領)이 서는데, 반드시 조정을 경유하게 했기 때문에 완급에 대응함에 있어 매양 때에 뒤진 것이 두 번째 폐단이다. 곽자의(郭子儀), 이광필(李光弼) 등이 모두 명장인데도 이들에게 위임하지 않고 아홉 절도사로 하여금 일시에 출병하게 함으로써 서로 의심하게 만들고 명령이 여려 곳에서 나오게 된 것이 세 번째 폐단이다.”
너무도 정곡을 찌르는 지적이라 두 경연관은 “참으로 성교와 같습니다”라고 정조의 뜻에 감동을 아끼지 않았다.
정조는 다시 이들에게 물었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이란 무엇인가?”
“옛 글을 익혀서 새 것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지가 않다. 초학자는 그렇게 보는 수가 많은데, 대개 옛글을 익히면 그 가운데서 새로운 맛을 알게 되어 자기가 몰랐던 것을 더욱 잘 알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정조가 부연하여 설명한 내용은 사물을 판단하는 자신의 식견이 완벽하였음을 은연중에 강조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물론 정조 자신도 신하를 등용할 때 지나칠 만큼 신중하여 까다롭다는 평가를 들었다. 더구나 ‘큰 집을 짓기 위해서는 반드시 큰 재목이 필요하다’는 신념이었으므로 인재를 살피는 일에 전력을 쏟은 다음에야 등용하곤 하였다.
그러나 일단 등용한 인재에 대하여서는 실로 완벽한 신뢰를 보낸 것처럼 말하였다. ‘설혹 그가 나를 저버리는 일이 있더라도 나는 그를 저버리지 않았다.’고 했을 정도로….
말은 그렇게 했으면서도 정조는 모든 사안을 혼자서 처결하였다. 신하들의 능력을 의심하였기 때문이다.
‘친히 모든 일을 처리하느라 앉아서 아침을 맞고 해가 기울도록 정무(政務)에 임했다’고 평가를 받는 것은 정조가 부지런하였다는 의미는 있어도 그가 신하들의 능력에 맡겼다는 말과는 거리가 멀다.
정조가 자신의 업무가 과중함을 스스로 탄식한 기록이 이를 잘 말해준다.
“나 혼자 1000칸의 집을 지키고 있다.”
이 얼마나 이율배반적인 탄식인가. 스스로 등용하기 전에 심사숙고 하고 등용한 뒤에는 모든 것을 맡겨서 신뢰하여야 한다고 말하고서는 실상은 정사의 모든 일을 혼자 맡아서 끙끙거렸고, 그 고통을 하소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면 이율배반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임금이 모든 일을 혼자서 감당하려 든다면 신하들에게는 책임의식이 결여되게 마련이고, 자신의 뜻을 내세우기보다 임금의 눈치를 살피게 되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다르지 않은 권력의 주변이다. 그러므로 정조는 등용하는 일에는 성공하였어도, 위임(委任)하는 일에 실패한 리더이었음을 스스로 고백하고 있음이 아니겠는가.
아무리 높은 식견도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깨우치게 하는 정조의 일화는 오늘의 지도자들이 명심해야 경구이고도 남는다.
[2010. 5. 6 데일리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