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광-‘신 언니’의 계모 = 우리들의 자화상


동문특별강좌 이택광-‘신 언니’의 계모 = 우리들의 자화상

작성일 2010-05-10
▲이택광(모교 교수)

‘국민 여동생’ 문근영이 본격적으로 성인 역을 맡은 <신데렐라 언니>가 인기리에 방영 중이다. 그냥 드라마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 드라마는 범상치 않은 사회적 진실을 보여주는 것 같다. 겉으로 보기에 이 드라마에서 주인공은 은조(문근영)이지만, 실제로 이야기에서 빠질 수 없는 존재는 은조의 엄마 강숙(이미숙)이다. 강숙이 없다면, 은조의 갈등은 발생할 수가 없다.

말하자면 <신데렐라 언니>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은조라는 ‘알파걸’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 강숙이라는 ‘엄마’에 대한 이야기다. 이 사실이 중요하다. 아버지가 아니라 엄마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 그래서 원작에서 강조되었던 ‘계모’의 의미는 희석될 수밖에 없다. 계모에서 엄마로, 이 작은 변화에 큰 비밀이 숨어 있다.

고전적인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서 개인을 책임지는 것은 사회였다. 사회는 시장에 협력하면서 동시에 시장의 경쟁이 초래하는 스트레스를 중화하는 기능을 한다고 여겨졌다. 개발시대에 이런 역할 분담은 적절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상황은 사뭇 달라졌다. 경제위기라는 충격으로 한국 사회는 심하게 흔들렸다. 이 위기를 무마하기 위한 ‘불가능한 환상들’이 범람하기 시작했는데, 가족도 이들 중 하나다.

그러나 이 당시에 출현한 가족에 대한 환상은 고전적 자유주의가 설파하는 그 ‘따뜻한 가족’의 이미지가 아니었다. 이 가족은 신자유주의적 경제논리를 구현하는 최전선으로 바뀌었다. 신자유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인적 자본’이다. 이 자본을 재생산하는 역할이 가족에게 주어진 것이다. 이런 가족의 역할로 인해 ‘엄마-아이’의 관계를 중심으로 새로운 담론이 만들어진다. 이른바 자식 교육에 모든 것을 바치는 ‘대치동 엄마’라는 새로운 주체로 등장한 것이다. ‘기러기 아빠’라는 기현상 또한 이런 변화가 초래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적 담론은 인적 자본의 축적을 위해 아이의 교육에 투자하는 엄마를 ‘이상형’으로 설정한다. 이런 분위기에서 교육에 무관심한 부모들은 자연스럽게 ‘나쁜 사람들’로 찍힌다. 심지어 자녀를 ‘대안학교’에 보내더라도, 그 이유는 나쁜 부모가 되지 않기 위한 것이다.

<신데렐라 언니>는 이런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되비쳐 보여주는 거울상이다. 신데렐라 이야기에서 신데렐라에 해당하는 효선과 계모의 갈등이 중심을 차지할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 드라마가 보여주려는 것은 ‘엄마-딸’이라는 관계에서 엄마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물론 극중에서 엄마인 강숙은 ‘좋은 엄마’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딸을 윽박지르고 이중적 성격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악녀에 가깝다. 이런 강숙이지만, 딸에 대한 집착은 맹목적이라고 할 만하다. 예를 들어, 은조가 집을 나가겠다고 대성에게 선포했을 때 보인 강숙의 ‘쇼’. 강숙은 충격으로 기절한 척 연기를 한 뒤에 은조에게 절대 집을 나갈 수 없다고 엄포를 놓는다. 강숙에게 은조는 포기할 수 없는 ‘자본’인 것이다. 이 자본은 경제적 이익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식을 훌륭하게 키워낸 ‘성공한 엄마’라는 심리적 만족까지 부여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국 사회가 자식 교육에 목을 매는 이유를 이 드라마는 자기도 모르게 패러디하고 있는 셈이다.

[2010. 5. 7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