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혜실-4월의 봄, 그 끝자락에서


동문특별강좌 최혜실-4월의 봄, 그 끝자락에서

작성일 2010-04-26
▲최혜실(모교 국어국문학 교수)

원래 목련, 개나리, 진달래, 그리고 벚꽃이 차례로 피고 지는 법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이상하게도 이 네 종류의 꽃이 한꺼번에 피고 또 지고 있어서 캠퍼스 안은 꽃천지를 이루고 있다. 워낙 언덕 위에 올라와 있는 교수회관인지라 옥상에서 보는 캠퍼스의 봄은 참 아름답다는 말이 상투적으로 느껴질 정도이다. 더구나 이상 저온으로 1주일 이상 늦게 핀 꽃들 때문에 중간고사 주간은 학생들에게 더욱 우울하다.

그래도 그 청춘이 어디 갈 것인가. 본관 앞의 분수대 계단에 앉아 눈부신 햇살 속에서 꽃놀이를 즐기는 것이야 인지상정(人之常情·사람이면 누구나 가지는 보통의 마음)이지만 밤새도록 부르는 그들의 노래에 연구실에서의 밤은 심란하기만 하다. 잠시 창문을 열고 연구실의 실내등을 꺼본다. 어둠 속에서 환하게 흔들리는 벚꽃을 보며 아주 먼 옛날을 떠올린다.

80학번이니까 30년 전, 대학교 1학년 때였다. 역시 봄이었고 어김없이 진달래와 벚꽃이 피어있었던 4월하고도 19일이었다. 아침부터 정말 쉬지 않고 내리던 비 때문에 학생들이 수유리 4·19 국립묘지에 섰을 때는 감각도 없을 정도로 비에 얼어 있었다.

‘눈이 부시네 저기 난만히 멧등마다/ 그날 쓰러져 간 젊음 같은 꽃사태가/ 맺혔던 한이 터지듯 여울여울 붉었네/ 그렇듯 너희는 지고 욕처럼 남는 목숨/ 지친 가슴 위엔 하늘이 무거운데/ 연연히 꿈도 설워라 물이 드는 이 산하.’

누구랄 것도 없이 모두 함께 불렀던 노래였다. 그날 쓰러져 간 학생들과 시민들의 붉은 정열처럼 묘지 근처에 그렇게 처연하게 피어있었던 진달래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러나 다시 학교로 돌아오던 길은 우울했다. 소위 ‘서울의 봄’이란 기쁨과 축제의 분위기에서 뭔지 모를 불안한 조짐들이 떠돌고 있었던 때였다. 그런 상황에서 하필이면 4·19날 벚꽃놀이 미팅에 남자친구의 파트너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죄스러운 마음도 잠깐, 창경원(현 창경궁)의 야경은 너무 아름다웠다. 습기에 젖은 꽃잎 위로 빛이 번져서 퍼지는 야경도 일품이었거니와 솜사탕, 회전목마 같은 소품이 성마른 마음을 많이 눅여주었었다.

몇 달 뒤, 휴교령이 내려졌고 서울의 거리에서 학생들은 숨도 못 쉬고 걸어다녀야 했다. 그 서러운 땡볕이 떨어지던 서울 한복판의 어느 도서관에서 속절없이 공부만 해야 했던 시절, 흘러나오던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에 뜨거운 눈물을 흘렸을 때, 내가 느꼈던 감정은 우습게도 그날 벚꽃놀이에 대한 죄의식이었다. 당시 많은 학생이 이 위기의 시대에 연애는 사치라고 생각했던 때였다.

전경들이 학교 배지를 단 대학생만 보면 소지품 검사를 해대는 통에 그때부터 배지는 학생들의 가슴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침묵하는 학교, 죄인 취급을 받는 학생 신분에 대한 설움이 겹쳐 대학에 대한 경외감이 사라진 때문일 터이다.

그러고 보면 이 꽃 시절에 오직 자신만을 생각하며 즐길 수 있는 이 시대의 젊은이는 행복하다. 취업을 위한 스펙을 쌓는 데 하루 온종일을 온전히 바쳐야 하는 ‘88만원 세대’(20대 비정규직의 평균임금)에게 인간의 존엄성이 가장 절박했던 시대가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오히려 잔인한 일일까. 민주주의가 단계적으로 성취될 수 있었던 이유가 경제 발전에 따른 국민의식의 성숙 때문인데 밥이 해결되지 않는 이 사회가 과연 발전한 것이냐고 되묻는다면 답변이 곤란하기는 하다.

어둠 속에서 소리는 훨씬 가까이 다가와 깊게 울린다. 학생들의 수근거리는 소리가 그들의 노래와 함께 들린다. 지금 어느 꽃 그늘 아래에서 학생들이 사랑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일까?

최혜실 경희대 교수·문학평론가
[2010. 4. 23 세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