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특별강좌
서혜경-`펜과 잉크의 힘`
▲서혜경(모교 음악대학 교수)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너무나 어지럽다. 세상이 변해도 너무 빨리 변한다. 컴퓨터로 인한 IT산업의 발달을 생각하면 정신이 없다 못해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얼리어답터와 디지털 유목민들은 말을 타고 달리는데 나 같은 디지털 낙오자들은 걸음마도 못한 채 용어조차 생경하다. 매일매일 쏟아지는 인터넷 신조어들과 디지털 약자들에 대한 이해나 암기를 포기한 지는 이미 오래다. 해마다 달마다 바뀌는 전자기기들은 작동법조차 스트레스다.
30년 전만 해도 변화는 느렸고 따라서 시간도 더뎠다. 생활엔 리듬이 있었고 삶엔 아날로그적인 여백과 낭만이 있었다. 그러나 메가와 기가와 테라를 따지는 시대에는 `생활의 리듬`이 아니라 `생활의 진동`을 느껴야 한다. 여백과 낭만 대신 스피드와 자극이 최고의 가치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변화가 느린 만큼 옛날엔 미래에 대한 예측도 쉬웠다. 내년과 내후년엔 어느 정도의 변화와 발전이 있으리라고 대충은 예견할 수 있었다. 5년, 10년도 어렵지 않게 내다볼 수 있었다. 하지만 요새는 1년 후를 짐작하기가 어렵다. 변화가 급격할수록 미래에 대한 예측이 더욱 절실한데도 말이다.
21세기가 도래하기 전 1990년대엔 다음 세기에 없어질 물건들에 대한 얘기가 심심찮게 나오곤 했다. 그중의 한 가지로 종이신문도 들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TV 등 전파매체의 힘에 그 위세가 많이 꺾이긴 했지만 종이신문은 언론의 꽃이었다. 그런 언론의 중심 매체가 IT혁명의 여파로 다른 수단으로 대체될 것이라는 예상이었다.
동서고금의 명언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진리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미국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의 "나는 신문이 없는 정부보다는 정부가 없는 신문을 택하겠다"는 말도 지난날의 허구로 변할 것이라는 예언이었다.
이처럼 날카롭고 대담한 예측에도 불구하고 나는 종이신문의 미래를 밝게 예측한다. 아마 그 영향력도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인생의 일곱 계단`의 저자 에드워드 멘델슨은 "소설에선 좋은 사람은 행복해지고 나쁜 사람은 불행해진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경주는 빠른 자가 이기고, 싸움은 강한 자가 이긴다. 그래도 삶의 어떤 영역에서만은 소설의 결말이 진실이다. 좋은 사람들은 책을 통해 좀 더 차분하고 용감해지며, 불안과 질투를 극복하고 불의의 재난을 견딜 능력을 갖게 된다"고 했다.
인간문화에서 소설이 사라질 수 없듯이 종이신문도 마찬가지다. 우리 생활의 어떤 부분에선 그 어떤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기능을 신문은 가지고 있다. TV뉴스 30분을 다 받아 써도 뉴욕타임스 반 면도 안된다는 조사가 있었다.
화려한 화면과 잘생긴 앵커들의 능란한 화술에 시간 가는 줄 모르지만 지나고 나면 남는 것 없이 손아귀 속 모래알처럼 다 흩어져 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영상정보와 디지털정보의 속성이 아니겠는가.
디지털정보의 부작용은 인스턴트성과 휘발성에 있다. 정보의 사냥꾼들이 웹의 바다에서 토막지식들을 낚시질 하다 보면 사건의 현상을 깊이 있게 분석하고 정리하는 힘은 결여되게 마련이다. 독창적이면서도 거시적인 사유능력의 결핍증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슬람교의 선지자 마호메트는 "학자의 잉크는 순교자의 피보다 더 성스럽다"고 했다. 기막힌 표현이다. 이처럼 여러 가지를 내포하는 함축적이고 간결한 비유를 찾기는 힘들 것이다. 나는 종이신문의 검은 잉크가 HDTV의 화려하고 눈부신 천연색보다 더 아름답고 은은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보기도 한다. 누가 뭐래도 기자의 컴퓨터 자판은 정치가의 입보다는 우직하고 정확하다. 오늘 신문의 날을 맞아 신문의 생산과 보급에 종사하는 모든 분들의 행운과 건투를 빈다.
[서혜경 피아니스트ㆍ경희대 교수]
[2010. 4. 6 매일경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