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특별강좌
50년 전 내가 본 금강산
50년 전 내가 본 금강산 - 홍함표(법10회, 변호사)
현대그룹 정주영 명예회장이 500여 마리의 소떼를 몰고 북한에 갔다가 금강산(金剛山)관광의 선물을 안고 돌아온 이후 국내 매스컴은 연일 금강산의 아름다운 자태를 찍은 온갖 사진을 소개했고, 온 국민의 관심도 거기에 집중되어 있었다.
언젠가는 내 소년시절의 꿈과 추억이 담겨 있는 원산(元山)과 송전(松田)생활 그리고 금강산을 관광한 추억담을 글로 쓰고 싶었는데, 지금이 바로 그 적기인 것 같다.
열두 살 때 부모님과 함께 온정리(溫井里)에서 약 한 달간을 머물면서 금강산을 구경한 적이 있었는데, 이것은 내게 더없이 자랑스럽고 아득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내가 금강산을 가게 된 데는 관광의 목적이라기 보다는 특별한 사연이 있었다.
해방이 되던 해에 나는 부모님과 함께 원산에서 살고 있었는데, 부모님께서는 김일성의 통치를 피하여 고향인 이남으로 월남을 계획하고 계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1947년 2월 원산에서 기차편으로 연천역에 도착하여 육로로 한탄강을 건너 월남할 계획이었는데, 내가 연천역에서 보안대원에게 체포되어 철원에 있는 삼팔대라는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 다음날 부모님과 누님은 나만 떼어놓고 월남할 수가 없어서 삼팔대 감옥으로 면회를 오셨는데, 그날로 전 가족이 모두 구속되었다.
나는 20일간, 부모님은 19일간의 감옥생활을 한 후 다시는 월남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석방되었다. 감옥생활에서 온 심신의 고통과 피로를 풀고 다시 월남계획을 짜기 위하여 간 곳이 바로 외금강 초입에 있는 온정리 여관이었고, 이것이 금강산을 관광하게 된 동기였다.
온정리는 다른 농촌마을과는 다르게 단층집으로 된 깨끗한 여관들이 즐비한 조그만 그림 같은 마음이었다. 거리도 깨끗했고, 여관도 깨끗하게 손질되어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40∼50대의 아주머니들이 청어를 가득 담은 광주리를 이고 다니면서 청어를 사라고 외치곤 했다.
청어는 장전 앞바다에서 잡은 것인데 너무도 싱싱하여 꼭 푸른 물감으로 그려 놓은 것처럼 보였다. 청어를 사서 여관집 주인에게 주면 그것을 구워 밥상에 올려 주었는데, 그 맛이 전에 원산에서 먹어 보던 것보다 훨씬 맛있었다.
처음 와 보는 낯선 곳에 대한 호기심으로 아침 일찍부터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보곤 했는데,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금강산이 화려하고 절경이라는 것보다는 온정리라는 마을이 깨끗한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뜨겁고 맑은 온천물이 개울(개울이라고 하는 게 맞을지, 수로라고 하는 게 맞을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생각하면 인조개울이라고 생각됨)을 통하여 밤낮없이 흘러 아침이면 동네 아낙네들이 그 개울가에 앉아 빨래를 하던 모습이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이 개울이 인조 수로 같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이것이 보통 개울처럼 한 줄기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수십 호의 집 앞을 골고루 구비구비 돌아 모든 사람들이 집앞 개울에서 온천물로 빨래를 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온정리를 바다가 가까워 수산물이 풍부하고, 많은 관광객이 찾아와 돈을 뿌려 주고, 산수 또한 절격이니 그곳이 바로 신선이 사는 마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정이 그러하니 동네 사람들은 집과 주변환경을 깨끗이 하고 옷을 깨끗하게 빨아 입는데만 신경을 써서 마을 전체가 그림처럼 아름답고 깨끗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렇게 아름답던 온정리 마을이 지금은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하다. 듣자니 북한당국은 한국 관광객들과 온정리 마을 사람들의 접촉을 피하게 하려고 온정리에 새로운 외곽 도로를 만들어 한국관광객이 온정리 마을 가운데를 통과할 수 없게 했다니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금강산은 얼마나 아름다운 산인가?
온정리에 머무는 동안 거의 매일 외금강의 구룡폭포, 만물상 등을 두루 돌아다니며 구경하였다.
금강산은 세계 3대 명산 중의 하나로 가본 사람이면 "과연 금강산이다!"하는 탄성이 절로 나오게 된다. 지난 11월15일 현대 금강산호의 관광시험 운항에 다녀온 사람들이 그 황홀하도록 아름다운 비경에 대해 도하 각 신문에 기행문을 통해 소개한 그대로이다. 흔히들 설악산을 가본 사람들은 금강산이 설악산보다 조금 더 아름답지 않겠는가 하고 상상하는 경우가 많은데, 설악산과는 그 아름다움과 규모의 웅장함에 차원이 다르고 비교의 대상이 아님을 실제로 가 봐야만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심산대찰을 두루 다녔던 서산대사(西山大師)는 금강산은 그 아름다움에서 최고 명산이고, 웅장함에는 지리산이 최고이며, 묘향산은 그 두 산을 섞어 놓은 것 같은 산이라고 평했다고 한다.
금강산의 구룡폭포, 만물상 등 온갖 비경의 아름다움은 신이 만든 엄청나게 큰 규모의 조각품이라고 함이 적절한 표현일 것이고,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일 것이다.
금강산 관광선 현대 금강호가 1천8백여 명의 관광객을 싣고 11월 18일 동해항을 출발한 것은 실로 분단 53년만에 이루어진 역사적 사실이다. 이것은 민간 차원에서 분단의 벽을 허무는 교류의 물꼬를 텄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금강산 관광 여객선의 취항은 민간차원에서 북한측과 협의가 시작된 지 10년이 경과하여 결실을 본 것이니, 실로 통일의 길은 멀고 험난하다. 과연 실향민 세대가 살아 있는 동안 통일이 될 수 있겠는가 하는 회의마저 갖는 사람도 의외로 많은 게 현실이다. 우리 속담에 '시작이 반'이라고 했으니 이미 반은 성공했다고 자위하여도 될 것 같다.
앞으로 금강산에 그치지 말고 원산과 황해도 그리고 평안도에도 갈 수 있는 서해안의 뱃길도 열리기를 기원하며 기대해 본다.
아울러 금강산 관광 구역 안에 남북이산가족 면회소 설치는 반드시 성사되어야 할 것이다. 그 일이 그리 쉽지 않을 것이나, 첫 술에 배부를 수 없듯이 꾸준히 참고 노력하며 이를 성취함으로써 남북간의 신뢰를 높이고, 이산의 아픔을 해소하며, 남북간의 거리를 좁혀 통일의 시대로 다가가는 역사의 출발점이 되기를 기원한다.
- 1999년 3월 (123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