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기행(26)


동문특별강좌 인도기행(26)

작성일 2005-02-19

< 절대군주의 王陵을 능가한 웅장한 진나의 墓 >
 
이윤희 (사학21회. 문학박사. 서일대학교수)

  파키스탄은 훌륭한 고고학적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는 나라다.
  파키스탄에는 세계 4대문명의 발상지 가운데 하나인 인더스 문명의 주요 유적이 자리잡고 있다. 모헨조다로, 하라빠, 코트디즈 등의 발굴은 고도로 발달된 인더스 문명이 적어도 기원전 2500년 경에 절정에 이르렀던 것을 잘 증명해 주고 있다.
  북쪽의 탁실라, 탁티바히, 스왓트, 페샤와르 등에는 훌륭한 불교문화유적이 남아있다. 불탑 승원 사찰 등은 간다라 건축조각을 훌륭하게 표현한 것으로서 그리스 미술기법을 도입하여 제작된 위대한 불교미술이다.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다섯 곳은 모헨조다로와 라호르 성체, 무갈시대의 살리마르 정원, 간다라 지방의 탁실라 유적, 무갈시대의 타타 유적 등이다. 유서깊은 탁실라의 경우는 유네스코가 탁실라 유적, 산기슭과 계곡 어느 곳 하나 빠짐없이 모두 한 덩어리로 묶어 세계문화유산으로 선포하였으니 그 놀라운 문화유산의 가치를 짐작해 볼 수 있는 일 아니겠는가.
  여행길은 언제나 예기치 않은 난관, 불편, 고생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상쇄할 만한 아름답고 가치있는 여운이 두고두고 뒤따르기에 나는 여행을 좋아한다.
  파키스탄의 새벽은 코란의 암송소리로 시작된다. 멀리서 코란의 독경소리가 고요한 산사의 목탁소리처럼 들려왔다.
  아라비아海가 바라보이는 항구도시 카라치는 한때 파키스탄의 수도이기도 했던 서양의 문물과 동양의 문물이 해상을 통하여 교역을 이루었던 곳이다.
  오늘 일정은 국립박물관을 관람하고 서점가에 들리고, 진나의 묘를 본 후 밤에 카라치를 떠나야 하기 때문에 서둘러야 한다.
  박물관에 들어서니 입구 첫 실에는 엉뚱하게도 7천 명의 모슬렘이 711년에 지브랄탈 해협을 건너 이베리아반도를 정복해 들어가는 대형그림을 그려놓았다. 사라센제국이 아프리카 북부를 거쳐 스페인 남쪽지방을 석권해 들어가는 내용을 묘사한 것 같다.
  서양 중세시대에 가장 걸출한 인물로 꼽히는 카알대제(샤르마뉴)도 스페인 남부지방에 도사리고 있는 모슬렘 무어족을 제압하지 못했지 않았는가. 西칼리프國(오마야왕조)의 중심무대가 스페인의 코르도바가 아니었던가.
  인도와 파키스탄에 수립된 모슬렘왕조는 이론적으로는 바그다드를 근거지로 하는 東칼리프國(압바스왕조)의 세력권 아래 있었다고 할 수 있지만 모슬렘이 멀리 유럽으로 처들어가는 장면을 여기 입구에 커다랗게 그려 놓은 것을 선뜻 이해하기 힘들다. 세계를 정복해 들어가는 모슬렘의 용맹과 그 위세를 과시하려는 것일까?
  이층에는 인더스 유적에서 광범하게 발굴된 유물이 잘 진열되어 있었다. 사실 인더스 문명의 유물이 가장 많이 잘 보존되고 있는 곳은 뉴델리의 국립박물관이고 또 여기 카라치 국립박물관에도 모헨조다로 박물관 못지 않게 인더스문명의 유물들이 다량 진열되어 있다.
  인더스 문명의 대표적 유적인 모헨조다로와 하라빠 유적이 발굴된 것이 인도의 독립, 즉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립되기 20여년 전인 1920년대에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립되기 이전의 인도의 수도는 뉴델리였고, 파키스탄 수립 초기의 수도는 카라치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들 박물관에 인더스문명의 유물이 다량 보존되어 있는 것은 이해할만 하다.
  이미 4∼5천년 전에 인도인들은 남달리 몸치장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던 듯하다. 오늘날 인도대륙의 여인들이 상층계급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하층민들까지도 목걸이, 팔찌, 귀걸이, 코걸이, 반지, 발찌 등 요란한 장신구를 곁들이는 것도 이들의 오랜 관습의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수염을 길렀고 뒤로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있는 약간 붉은 색을 띤 나체 조각, 조각은 특히 여성의 裸身이 많이 눈에 띠었다. 가슴을 엄청나게 크게 돌출시키고 엉덩이를 풍만하게 강조하고 있다. 말할 것도 없이 고대 세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여인의 풍만한 나상은 多産을 기원하는 의미로 해석된다.
  좀 큰 것도 있지만 어떤 것은 어린애 주먹보다 작은 母神이 여럿 보이는데 이는 어머니는 창조의 근원이라는 생각에서 강조되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후대의 아리아족 인도사회에서는 男神이 우위를 차지하지만 인더스 문명시대에는 女神이 우위를 차지했다는 점에서 보면 이상할 것은 없다.
  인더스 유역에서 2천여 개가 넘는 인장이 발견되었으며 거기에 새겨진 글자(그림)는 아직 판독하지 못하고 있지만 여기에 베다神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 특히 주의를 끈다.
  인더스 문명은 기원전 1500년 경에 아리아족이 인도에 침입해 오기 전에 혹은 그들에 의해 멸망된 것으로 보고 있는데 모헨조다로 유적에서 아리아족의 神 예컨대 삼면신(三面神) 시바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하라빠 실은 문이 잠겨 있어 열어 달라고 해서 보았다. 하라빠 유적에서 보면 장례풍습이 다른 지역과 달라보였다. 인도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에외없이 화장을 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아주 옛날에는  매장과 화장이 병행했던 것으로 보는데 하라빠 유적에서는 조그만 단지가 무덤에서 나왔다. 너무 작은 단지이고 보니 시체를 분활해서 매장했는지 혹은 시체를 화장해서 그 뼈가루를 넣었는지 모를 일이다. 단지는 도자기로 색깔은 불그스레하고 표면은 매끈하고 모양이 상당히 예쁘다.
  땅덩어리가 큰 인도와 파키스탄에서는 어느 곳을 찾아가든 광활하게 널려진 벌판을 몇 시간, 아니 하루종일 바라보며 가게 된다.
  모하마드 알리 진나(1876∼1948)의 묘 또한 5만평으로 조성된 부지에 잘 가꾸어진 잔디에 조경시설을 갖추고 연회색 대리석으로 지어진 대단히 크고 넓은 훌륭한 기념비였다. 언뜻 느낀 바로는 그 규모에 있어서 인도 무갈제국의 사자한 대왕이 왕비를 위해 건조한 인도의 자랑거리 타지마할 묘를 연상케 했다. 외부로 돋아난 건조물과 거대한 돔은 그 크기에 있어서 타지마할에 버금갈 정도였다. 그렇지만 세계인을 감탄케 하는 타지마할의 우아한 아름다움에 어찌 비교될 수 있겠는가.
  파키스탄 정부로서는 마땅히 만들어 놓아야 할 이 기념비적 장엄한 묘는 파키스탄 장래를 짊어질 청소년들의 훌륭한 교육장으로 여겨졌다. 이곳에는 실제로 많은 학생들이 마치 우리가 경건한 마음으로 현충사를 참배하듯 이 진나의 묘를 찾는 학생들의 행렬이 그치지 않고
있었다.
  파키스탄 군인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돔의 외각부분 사면에 각 1명씩 4명, 돔 내부에 4명이 경비를 서고 있는데 한결같이 크고 외모가 준수하였다. 10분 간격으로 대장의 호루라기에 맞추어 긴 다리를 직각으로 올리고 걸어가는 근무형태를 보여주는 것도 방문객의 시선을 끌었다.
  진나의 돔 부속 건물에는 진나박물관이 만들어져 있었다. 진나가 생존시 평상 때 입었던 옷, 그가 사용했던 가구, 침대, 고급스런 자동차, 간디와 네루 그리고 영국 통치의 마지막 인도총독 마운트 벳튼 등과 찍었던 사진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모퉁이를 돌아가면 또 다른 방에 진나 가족으로 생각되는 4개의 관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파키스탄의 國父, 파키스탄의 창설자이며 초대 총독(수상)이었던 진나를 기념하기 위하여 옛 수도 카라치 한 복판에 세워진 이 묘역에서도 카라치 현대식 공항에서 보았던 정결한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인도와의 경쟁, 더 나아가 대립의식이 곳곳에 베어있음 또한 발견할 수 있었다.
  파키스탄 카라치에 있는 진나의 돔을 찿아 보면서 나의 머리엔 인도의 델리에 있는 간디의 묘를 찾아보았던 일이 떠올랐다.
  국가와 민족을 구한 간디의 묘는 라지가트라고 불리는 곳으로 델리성 밖 자므나江 기슭에 있었다. 입구에서도 상당한 거리를 걸어 들어가니 간디의 묘는 그의 세계적 명성에 비하면 초라할 정도로 검소해 보였다. 인도의 國父인 간디의 생전의 삶 그 자체를 영원히 기리기라도 하듯 치장이나 위용이라곤 없이 검소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20세기 최대의 성자 마하트마 간디 묘는 참배객이 끊이지 않아 간디의 생활철학이고 독립운동에 있어서 행동철학이었던 그의 사티야그라하(진리추구)운동이 영국지배자들을 굴복시키는데 끝나지 않고 오늘도 인도 국민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듯이 보였다.
  흔히 파키스탄은 ‘진나의 작품’이라고도 말하고 진나 자신도 이를 긍정하였다.
  그렇다면 인도 파키스탄 분립의 책임을 모슬렘 지도자였던 진나에게만 돌려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힌두 지도자인 간디나 네루에게도 동시에 그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인가?
  인도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단체가 국민회의였고, 마하트마 간디가 그의 범국민적인 사티야그라하 운동을 전개할 때도 그의 배후에는 항상 국민회의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진나가 그의 파키스탄운동을 거세게 추진해 나가는데 있어서도 그의 배후의 힘은 모슬렘연맹이었다.
  진나는 모슬렘연맹에 가입했으면서도 처음에는 국민회의와의 긴밀한 관계를 그대로 유지하였다. 진나는 인도에서 힌두와 모슬렘의 화해를 위해서는 그들의 대표기관인 국민회의와 모슬렘연맹의 화합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보았으며 따라서 자신은 종파주의자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서구식 교육을 받은 의회주의자였다.
  진나는 어린 시절 잠시 동안의 봄베이 생활을 제외하고는 출생지였던 카라치에서 대부분 교육을 받았으며 런던에서 변호사 수업을 마치고 그가 봄베이 지방 변호사협회에 등록하고 활동을 시작한 것은 1896년 이었다. 우연의 일치인지도 모르지만 후일 인도는 간디와 진나 뿐만 아니라 자와할랄 네루와 빠텔 등 변호사 출신들에 의해서 그 장래가 결정될 운명에 놓이게 된다.
  철저한 의회주의자이고 힌두와의 화해를 모색했던 진나가 파키스탄 분립운동으로 줄달음치게 되었던 것은 1937년의 지방선거에서 연립정부의 구성을 약속했던 자와할랄 네루의 배신행위가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진나는 철저한 민족주의자요 편협한 종파주의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마하트마 간디는 파키스탄 분립운동을 그의 사전에서 가장 격렬한 어휘인 ‘거짓’이란 말로 표현하면서 끝까지 사심없이 통일인도를 외쳤지만 부풀어오르는 정권욕을 외면할 수 없었던 진나와 네루는 힌두와 모슬렘의 종파주의에 편승함으로써 애석하게도 간디의 영향력은 점점 약화되었는데 이것이 결국 두 나라로 분립되는 비극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 그 동안 인도문화기행을 연재해 주신 이윤희 동문과 애독해 주신 동문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동문여러분들의 새로운 원고를 기다리며 인도문화기행을 마무리 합니다 ******

- 2000년 3월 (133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