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특별강좌
인도기행(20)
< 하늘아래 첫 王國 네팔 >
이윤희 (사학21회. 문학박사. 서일대학교수)
---- 하누만독카 왕궁의 쇠락한 모습은 크게 뜻을 펴보지 못한 네팔 왕국의 옛 모습을 연상케 하고...
네팔 여행길에 올랐다.
네팔은 독립국이지만 인도와 역사적 전통을 같이 해 왔다. 석가모니는 인도에서 태어났지만 그 출생지인 룸비니는 오늘날 네팔 국내에 위치해 있다. 우리가 살펴보는 인도 역사의 범위는 오늘의 인도 뿐만 아니라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네팔 및 아프가니스탄 일부가 당연히 포함된다.
나는 잠시 인도를 떠나 또다른 인도 역사의 무대인 주변국가로 발길을 돌려보았다.
캘커타 슈바스찬드라보스 공항을 이륙하여 비행기가 상공에 떠 있는 시간은 딱 한시간 이다. 30분쯤 지나자 강줄기가 여럿 보인다.
저 강이 인도의 젖줄인 간지스 강인가?
간지스 강은 히말라야 산에서 발원하여 인도 북부지방의 중심을 통과하고 있지만 결국은 캘커타를 감싸고 돌아 벵골만으로 빠져나가고 있으므로 간지스 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된다. 혹시 그렇지 않으면 인도 3大 강의 하나로서 방글라데시를 거쳐 나가는 브라마푸트라 강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앗! 오른쪽으로 장엄한 히말라야 雪山이 보이기 시작한다. 처음엔 구름 속에 떠 있는 멋있는 구름 산으로 착각했다.
수만피트 상공에서 멀리 히말라야를 바라보며
구름속에 떠 가는 나
하늘에 닿을 듯 솟아있는 히말라야
나는 숨어서 경이로운 그 자태를 본다.
만년설 뒤덮인 산맥이 흘러내리고
지상의 모든 것 저 아래에 두고
아귀다툼 인간세상 굽어보며
구름 위로 병풍처럼 늘어 서 있는 백색 섬들
밀림과 계곡으로 굽이치는 카투만두
오로지 하늘에 안겨있는 히말라야
무섭도록 가파르게 깎아지른 계곡이 발아래 펼쳐지고 있다.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었던 변화무쌍한 대자연의 신비가 이곳에 있다. 네팔로 들어갈 때는 반드시 낮시간 비행기를 이용하여 카투만두의 밀림, 계곡, 구름 속에 놓여있는 히말라야를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카투만두 계곡은 사방 30킬로 남짓되는 분지형태의 지형으로 되어있다. 전해 내려오는 神話에 의하면 네팔을 지키는 수호신이 커다란 칼로 남쪽의 산허리를 잘라 버렸기 때문에 호수의 물이 마르고 그곳에 계곡이 생겨났다고 한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이 비옥한 계곡에 어느날 부터인지 사람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네팔 왕국의 역사는 B.C 8세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국토가 통일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200년전의 일이다. 당시까지 이 계곡에는 키라티 王朝에 이어서 티베트 계의 니와르족이 세운 말라 王朝가 화려한 문화와 전통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 당시 말라 왕조는 4개의 도시국가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 도시들은 지금도 카투만두 계곡에 남아 옛 榮華를 보여주면서 관광지로 남아있다.
그 4개의 도시들은 큰집격인 카투만두를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바드가우, 남쪽의 파탄, 그리고 가장 작은 서남쪽의 킬티푸르 들이다.
한편 중부 히말라야의 산악지방에 살고 있었던 강인한 민족성을 지닌 구르카족은 현재의 통일 네팔을 이룩한 家系이다. 구르카족은 강력한 무력을 바탕으로 주변에 소왕국들을 차례로 굴복시키던 끝에 마침내 네팔의 중심이며 오랜 전통과 화려한 문화를 자랑하던 카투만두 계곡의 말라 왕국과 대치하기에 이른다.
1737년 카투만두 북쪽 누와고투라는 요새에서 첫 전투가 벌어진 이후 카투만두 계곡은 오랜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그후 구르카의 군대는 칸티푸르, 라리푸르, 박타푸르를 차례로 정복했으나 가장 작은 킬티푸르 만은 예외였다. 킬티푸르는 무려 11년간을 고립된 상황속에서 저항을 계속했다. 막강한 구르카의 군대도 오랜 전투 끝에 많은 희생자를 내게 되었다.
15년간의 처절한 전쟁 끝에 1769년에 킬티푸르는 衆寡不敵으로 밀리고 밀려 결국 항복하기에 이른다. 구르카軍은 이 전쟁에서 이긴 후 너무나도 끈질긴 저항에 대한 분노였는지 어린이와 노약자를 제외한 킬티푸르 사람들 대부분에게 코를 베어내는 잔인한 복수를 했다.
이때 잘라 낸 킬티푸르인의 코를 모아 킬티푸르市 외각에 땅을 파고 묻은 다음 그 위에 무덤을 만들고 탑을 세웠다. 그래서 이 탑을 코무덤이라 부르고 있다. 탑은 구르카족에게는 전승기념으로, 킬티푸르족에게는 아픈상처에 대한 잊지 못할 기억으로 아직도 그곳에 퇴락한 채 서 있다.
구르카족의 인도와의 교류는 활발치 못하여 힌두聖地를 다녀가는 것과 소규모 교역이 이루어지는 정도였다. 교역의 대표적인 것은 얼음이었다. 구르카족을 다스려온 라즈푸트 힌두 지배자는 이 히말라야 왕국을 강화해 가다가 18세기 중엽에는 카투만두를 평정하였다. 또 그는 남서쪽으로 이동하여 심라 지방을 함락시킨 후 평원으로 관심을 집중시키자 역시 세력확장을 도모하고 있던 영국의 동인도 회사 세력과 충돌하게 되었다. 영국 측은 구르카족의 1만2천 병력을 공격하기 위해서 3만4천 병력을 동원하였으나 영국군의 4개 부대 가운데 3개 부대는 참패하고 말았다. 자바섬 전투에서의 영웅 길레스피 장군은 성급한 산악전투에 임했다가 패배하여 퇴각하던 중 전사하고 말았다. 헤이스팅스 총독은 다시 증원군을 파견하여 구르카족을 겨우 굴복시길 수 있었다.
동인도회사와 구르카족 사이에 1816년 사르고울리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이에 따라 구르카족은 카투만두에 영국인의 거주를 인정하고 또 남쪽의 변경지역을 영국 측에 양도하였다.
이 지역은 심라를 포함하고 있었는데 심라는 나중에 유명한 휴양지로 발전하였으며 영령인도의 여름철 수도가 되었다. 이 조약 이후 영국 측과 구르카족 사이에는 상호존중이 이루어져 계속 우호관계가 유지되었으며 구르카족은 그들의 本鄕인 산악지대에만 머물게 되었다.
인도인 가운데 가장 용감하고 강인한 종족으로 보통 시크족과 구르카족을 꼽는다. 영국군이 구르카족에게 苦戰했었지만 구르카족의 용감성이 돋보여 영국은 인도를 지배하는 동안 세포이(인도용병)에 구르카족을 다수 편입시켰다.
영국이 印度亞대륙에서 물러난지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영국군에는 상당수의 구르카족이 용병으로 남아있는 듯이 생각된다. 왜냐면 지난번 포클랜드 전쟁때 파병된 영국군에는 구르카족 용병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비행기에서 내리니 카투만두 트리비우만 국제공항 옥상 송영대에는 버어마와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인도와 티벳 사이에 끼어있는 히말라야 산악국가 네팔은 약 60년대 초반까지는 외국인 여행자들의 입국을 크게 통제해 왔지만 오늘날에는 관광객을 유치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다.
이 작은 나라에는 이렇다 할 근대적인 산업이 없고 관광등산세가 중요한 수입원이다. 산악국가이다 보니 경작지가 부족하지만 국민들의 생활은 대부분 자급자족이고 가옥이나 생활양식은 옛날과 별로 다름이 없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은 너그러워 보이고 표정은 밝다. 걸친 옷은 수수하지만 장신구는 인도 여인들 못지않게 많다.
두르바 광장에 있는 구왕궁 하누만독카를 찾았다. 광장으로 가는 길가에는 물건을 파는 잡화상들이 즐비하고 간혹 리어카나 우리의 지게와 흡사한 것에 과일을 담아 팔고 있다. 과일 값은 인도 보다는 높았다.
시계줄 몇 개를 좌판에 늘어놓고 있었는데 가격이 저렴하고 가죽의 품질과 색깔도 좋아 마침 낡아빠진 내 시계줄을 교체했다. 관광기념품 상점도 즐비하게 늘어서 있지만 물건을 사는 관광객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광장에는 할 일없이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시민들, 좌판상인, 천천히 걸어 다니는 사람들, 한가하게 노니는 사람들, 그림엽서를 사기위해 들어갔던 상점주인은 하품을 하며 손님을 맞는다.
구왕궁은 카투만두 중심에 자리잡고 있으며 보수공사를 하고 있었다. 입구에 빨갛게 칠을 한 원숭이 神인 하누만 상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 이라고 한다. 입장권을 사고 들어가는 왕궁 정문은 왜그리 조그맣고 좁게 만들어 놓았는지 답답할 정도이다. 전쟁과 정변의 소용돌이 속에서 쉽게 방어할 수 있게끔 일부러 작게 만들었다는 궁전의 수많은 문들이 이제는 관광객들의 기념사진의 배경으로 이용될 뿐이다.
다갈색의 목조건물은 칙칙하고 음산한 분위기가 감돌고 왕궁 지붕 위에는 무수한 비둘기떼가 파득거린다.
인도만 하더라도 수천년 풍화에 시달린 옛성도 왕궁다웠는데 네팔의 왕궁은 이 나라 특유의 목조가옥 양식으로 지어진 사원처럼만 보인다. 인도에서 대리석을 가지고 미려하고 섬세한 조각을 한 기둥, 난간, 칸막이를 경탄하며 보았던 것과 비교하면 네팔의 왕궁은 기교나 예술적 기품과는 거리가 먼 그저 나무의 소박함을 최대한 살렸다고나 할까.
왕궁의 방들을 구경했다.
역대 왕들의 초상화, 빛바랜 왕실 가족 사진들, 왕이 참석했던 행사들, 일상생활 모습, 훈장, 메달, 왕의 도장, 안경, 시계, 크고 작은 단추들, 담배케이스, 목걸이, 반지, 장갑, 스틱, 총, 장총, 갑옷 등 왕은 사진 찍기를 좋아했던지 여러 종류의 카메라와 가방들을 골고루 전시해 놓고 있다.
왕의 의자는 등받이에 황금빛 뱀이 칭칭 감겨있고 머리 위에 늘어뜨리는 장식을 단 황금뱀이 위에서 감싸고 있는 형상이다. 부다가야에서 석가모니가 좌선할 때 하늘에서 비가 내리니 코프라가 그 납작한 대가리를 활짝펴서 비를 가려 주었다는 형상과 같았다. 네팔 왕국에 스며있는 티베트 문화와 종교를 발견한 순간이었다.
카투만두 계곡에는 약 2천개에 달하는 사원과 기도소가 있다.
힌두교 사원, 불교사원, 티베트 풍의 목탑이 있는가 하면 인도풍의 스투파(탑)들도 어디서나 눈에 띤다. 힌두교 사원 안에 부처가 모셔져 있고 불교 사원 옆에 힌두교 상징들이 세워져 있는 것은 카투만두에서는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힌두교나 불교 모두 그 근원을 따져보면 같은 종교적 뿌리에서 연유했음이 사실이지만 두 종교가 가장 평화롭고 자연스럽게 공존하고 있는 곳이 네팔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힌두교와 불교를 막론하고 어느 집에나 祭壇이 차려져 있다. 이 나라는 종교가 곧 문화이자 생활임을 이러한 모습에서 쉽게 느낄 수 있다.
한 조그만 방에는 관을 놔두고 벽에는 관을 꽃으로 덮어 힌옷을 입은 많은 사람들이 관을 메고가는 왕실 장례식 광경을 그려놓고 있다.
오래된 건물이라 떨어져 나온 나무들은 왕궁안 바닥 한쪽에 늘어 놓기도 하고 보잘 것 없는 왕궁은 어둡고 우중충 하였는데 이 나라 장식품들이 검은 다갈색으로 흐르고 있는 것과 관련이 있는 듯 하다.
한사람이 올라갈 정도로 좁은 나무 계단을 몇차례 이리저리 바꾸어가며 오르니 왕궁 꼭대기까지 오를 수 있었다. 삐거덕 거리는 곳도 있고 춥고 빛은 차단되고 으시시하여 내려가 버리고 싶은 생각도 일어났지만 꼭대기까지 올라가 전망대의 목조창문을 통해 카투만두 시가지를 잠시 내려다 보았다.
두르바 광장은 왕실의 역사적 터전이다. 이 광장은 이 나라 국민의 종교적, 문화적 삶을 축소해 놓은 곳이고 바로 이곳이 네팔 왕들이 대관식을 갖는 곳이다. 市의 중심광장인 이곳에는 수많은 사원과 건축물들로 볼거리가 널려있다.
이 광장 안에 카스타만다르 라고 하는 오래된 목조사원이 있는데 카투만두라는 수도 이름은 거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 사원은 한 그루의 나무로 만들어진 사원이라는 전설이 있다.
왕궁과 유서깊은 사원들이 모여 있는 이 광장은 열린 공간이었다. 왕궁 마당처럼 보이는 두르바 광장엔 질서 정연하게 두줄로 좌판을 벌인 노점상들이 광장을 가득 메우고 늘어앉아 손님을 부른다. 나무, 야크뼈, 상아, 은, 구리, 동, 돌, 가죽 등으로 만든 갖가지 물건들을 늘어놓고 있다. 색색가지 준보석을 세공한 장신구나 주먹안에 쥘 정도의 보석함등은 서양인들에게 인기가 있어 보였다. 특히 야크뼈로 만든 장신구나 일용품, 짐승, 조각, 가면, 탈, 이국적인 장식품과 그릇들이 귀를 의심할 정도로 싸다. 대폭 깎는 맛이나 보기좋은 장식품이 그처럼 저렴한데 사지 못하면 틀림없이 귀국하여 후회하게 된다.
카투만두에는 티베트 난민촌이 있고 고국을 떠난 티베트인들은 인도 뿐만아니라 네팔에많은 수가 정착해 살고 있다. 이곳 노점상인들의 대부분은 티베트 난민들이라고 한다.
언젠가는 티베트도 독립을 인정받게 되겠지만 조국을 잃은 방랑민들의 기약없는 미래와 슬픈 눈동자들은 오늘도 카투만두 두르바 광장에서 관광객을 부르고 있을 것이다.
- 1999년 3월 (123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