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기행(18)


동문특별강좌 인도기행(18)

작성일 2005-02-19

< 成佛의 현장 부다가야 >

 이윤희 (사학21회. 문학박사. 서일전문대교수)

---------  그 옛날 부처님이 득도했던 보리수나무 밑에는 순례자의 행렬이 이어지고....

켈커타에서 기차를 타고 밤새도록 달려와 가야에서 내렸다. 부다가야는 한적한 마을이고 보니 주변에 큰 도시인 가야에 일단 접근해서 佛敎 聖地를 찾아가려고 한다.
가야는 북동 인도의 서쪽 중심지인 비하르 주의 도시이다. 간지스강 지류의 하나인 팔구강을 따라 놓여 있다. 켈커타에서 델리에 이르는 간선에 위치해 있고 여러 도시로 연결되는 도로가 교차하는 상업의 중심지이고 코타나그뿌르 간지스 평원이 만나는 지점에 근접해 있다.
여름에는 지독한 더위로 유명한 곳이다. 힌두교도들의 순례여행 중심지로 널리 알려진 가야는 년간 약 30만명의 순례자들이 모여들고 있다. 가야에는 45개의 성소가 있는데 북쪽의 프레실 언덕과 남쪽의 부다가야 사이에 있다. 성소의 대부분은 가야에 있고 주요사원은 1787년에 알야바인의 마라타 공주에 의해서 세워진 비쉬느 사원이 있다. 다른 사원들은 암석 투성이 이고 남슬라와 브라마지니 언덕으로 덮여있다. 가야지방 주변에는 곡식과 기름씨앗, 설탕수수가 펀펀, 모하르, 팔구강, 그리고 파타나 운하시설 등의 도움으로 재배되고 있다. 이 지방에서는 운무와 빌딩을 만드는데 쓰는 돌들이 생산되어 인도 전역에 공급되고 있다.
가야 남쪽에서 10km 떨어져 있는 부다가야는 석가모니가 태어난 네팔의 룸비니, 최초로 설법한 바라나시 근교의 사르나드, 열반에든 쿠시나가라와 함께 불교 4대 성지중 하나지만 불교도들은 깨달음을 얻은 부다가야를 불교 제일의 성지로 꼽는다.
그 옛날 현장, 혜초와 같은 구법승들이 세월의 흐름을 마다않고 멀고도 험난한 구법의 길을 묵묵히 걷고 걸어 찾아 갔던 부다가야, 나는 그 구법승들의 깊은 佛心이나 인내심을 따라갈 수 없으면서도 현대 교통수단을 이용하여 손쉽게 인류 精神文明의 産室인 부다가야를 찾아가고 있다.
成佛의 現場은 그 성스러운 보리수 밑에 자리잡고 있었다. 시달다 왕자가 6년 동안의 고행을 청산하고 좌선을 통해 진리를 깨달아 부처님이 된 바로 그 자리이다.
초기 불교 미술에서는 가끔 이 보리수가  부처의 상징적인 심볼로서 보리수, 발자욱, 연꽃으로 표현되고 있다. 실론의 아누라다뿌라에 있는 살아있는 보리수는 아쇼카왕이 BC 3세기에 그의 여동생인 샹가미트라를 포교 단장으로 해서 실론에 보낼 때 부다가야 보리수 나무 한 가지를 꺽어다가 심어논 보리수이다. 부다가야 원래의 보리수는 고목이 되어 죽고 말았는데 실론의 보리수 나무 가지를 다시 옮겨 놓은 것이 오늘 내가 바라보고 있는 현재의 보리수 나무이다.
보리수 바로 옆에는 BC 3세기에 그 지점을 기리기 위해 아쇼카 대왕이 순수한 제단을 세웠다.
다시 이 제단은 200년후 BC 1세기에 그 주변을 돌로 둘렀다. 그 일부는 아직도 남아있다. 직립부분은 베다神인 인드라와 슈드라를 표현해 놓고 울을 쳐 놓은 돌에는 상징적인 짐승들을 새겨 놓았다. 그러나 이 제단은 AD 2세기에 큐산왕조 때 현재의 마하보디사원으로 대체 되었다. 팔라새나 시대(750-1200 AD) 이것을 잘 손질하였다. 19c 후반에 알렉산더 커닝함에 의해서 다시 중추 되었다. 그리고 1882년에 버어마 불교도들에 의해서 마지막으로 보수되었다. 사원의 중앙탑은 54m이고 박물관은 다양한 불교 유물을 보존하고 있다.
석가모니가 참선했던 바로 그 자리에 아쇼카 왕이 세운 摩詞普 寺의 거대한  탑이 우뚝 서 있고 스투파 1층의 초대형 황금색 불상은 금장식과 꽃등으로 꾸며져 있었다.
탑 내부의 법당에는 참배자들의 열기와 향연기로 자욱하고 법당 뒷쪽의 보리수 나무 밑에는 참배자들이 끊이지 않는다. 경내에는 이역만리에서 모여든 순례자들로 붐볐다. 대탑 앞에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티베트 승려들과 신자들이 팔과 다리 사지와 이마를 땅에 대고 하는 五體投地를 되풀이 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맨땅에 온몸을 대는 것이 아니고 널판지를 깔아놓고 그위에 알맞은 담요자락을 펴놓고 손바닥에도 뭔가를 끼고 그 동작을 되풀이 하고 있어서 마음의 정성은 옛과 같지만 몸의 정성은 현대화된 느낌이었다.
천배를 하면 돌부처가 미소를 머금는다고 하는데 널판지위에서 하는 것도 어여삐 보시어 긍정하시니 저리하는 거겠지.
사원의 전체적인 구조를 보기위해 사원주변을 한바퀴 둘러보았다. 마하보리사 대탑외에도 조그만 탑들이 많고 훌륭한 스님들의 사리를 모셔놓은 부도도 많았다.
석가모니의 전기를 수록한 경전에 의하면 성도하기전 보리수 아래서 악마들의 온갖 유혹과 위협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수행자 싯다르타는 조금도 동요됨이 없이 아름다운 天女의 모습으로 나타난 마녀들의 유혹을 물리치며 타이른다.
"나는 이제 절대적인 정신의 자유에 도달하려고 한다. 내가 자유롭게 되면 세상사람들도 자유롭게 해 주리라고 생각한다. 허공을 지나가는 바람처럼 자유롭고자 하는 이 나를 어떻게 무      엇으로 잡아맬 수 있겠는가."
그래서 출가한 수행자들을 가르켜 바람. 구름. 물 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불타 석가모니가 성도하기전 수행자 시절에 당시의 종교도시인 <가야>를 찾아온 것도 어느곳에도 얽매이지 않는 바람처럼 구름처럼 물처럼 되고자 했음일까?
석가모니가 부다가야의 보리수 아래로 오기전 그는 라이란자나강 기슭 우르베라 마을에서 피나는 고행을 하고 있었다. 뒷날의 설법에서 극도의 苦行主義와 극도의 享樂主義를 배격하고 中道를 설파한 것도 자신이 왕자의 신분으로 왕궁에서 향락적인 생활을 경험했고 수도사로서 몸소 겪어서 체득한 고행주의가 인간을 구원하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때문이다.
부다가야는 아시아 불교 국가 어느 곳 보다도 순례자들의 발길이 모여들고 있었다. 한국. 일본. 월남. 티베트 승려들을 볼 수 있었다. 그 옛날 집념의 구도승 신라의 혜초가 지금부터 1천 3백여년전, 경주를 통해 인도로 갔던 것은 그의 나이 18세 때였다. 인도행을 위해 그는 그보다 여러해 전에 불법과 인도에 대해 공부하고 준비했다.
1908년 9월 프랑스의 동양학자이며 탐험가인 펠리오가 중국 돈황 천불등 석굴에서 앞뒤가 잘려진 두루마기 필사본을 발견했다. 인도 방면을 여행한 구도승의 기행문 임을 알게되고 이로 인해 영영 잃어버린 줄로만 알았던 혜초의 족적이 알려지게 되었다.
범현의 <佛國記>는 육지로 갔다가 바다로 온 기록이오, 현장의 <大唐西域記>는 험난한 서역길과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인도에 들어갔다가 다시 그길을 되돌아 갔다. 의정의 <南海寄歸傳>은 바다로 갔다가 육지로 돌아온 기록임도 비교가 된다.
시달다가 득도한 부다가야에 찾아오니 하늘에 닿을 듯 우뚝서있는 사각주 모양의 마하보리사의 거대한 탑은 오늘도 묵묵히 성인의 뜻을 발하고 있었다.
혜초는 이곳을 순례하며 이런 시를 읊었다.
   
    달 밝은 밤에 고향길 돌아보니
    뜬 구름은 너울너울 고향으로 돌아가네.
    편지를 봉해 구름편에 보내려 하나
    바람은 내 말을 들으려 않는구나.
    내 나라는 하늘 끝 북쪽에 있고
    이 나라는 땅끝 서쪽에 있네
    해가 뜨거운 남쪽에는 기러기가 없으니
    누가 내 고향 계림으로
    나를 위해 소식을 전할까?

혜초와 같은 구법승들의 발자취는 세속에 찌든 우리의 삶에 비해 너무나도 진실하고 거룩하다. 때문에 잠시나마 그의 발자취를 찾아가려는 것 또한 인간다운 삶의 소이가 아닐런지.....


- 1998년 10월 (119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