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특별강좌
인도기행(17)
< 佛敎 제일의 聖地 부다가야로 가는 지루한 여행길 >
이윤희 (사학21회, 문학박사·서일전문대학 교수)
------ 印度의 汽車旅行은 極度의 忍耐心과 불편이 따르는 苦行길과 다름없고......
이른 식사를 하고 호텔 로비에 있는 여행안내 데스크에서 부다가야, 싼티니케탄, 켈커타시내 관광 등의 일정을 알아보았다.
철도예약센타로 찾아가 건물 2층의 외국인 전통 매표소로 올라갔더니 수 십명이 차례를 기다리며 앉아 있다. 유럽인 여행객들이 간간이 보이는데 얼핏보아 그들은 많은 여행을 하였는지 표정과 매무새가 절반 인도인이 되어 있었다.
내 차례가 되어 매표원과 마주 앉았을 때 아슬아슬하게 오늘밤 8시 부다가야 출발 기차표를 구하게 된 것을 알게 되었다.
몇 차례 인도에 갔었지만 가보지 못했던 가장 중요한 불교성지 부다가야를 마침내 갈 수 있게 되는가 싶어 기차표를 다시 한 번 확인한 후 허리에 찬 지갑 속에 잘 넣었다.
건물 밖으로 나와 택시를 찾기 위해 서성거리다 한 한국인 여성을 만났다. 10세, 14세된 두 딸을 데리고 인도여행 중이라면서 델리, 아그라, 아잔타와 엘로라, 봄베이를 거쳐 켈커타에 들려 관광 중이라고 한다. 다음 목적지 부다가야를 가기 위해 나와 마찬가지로 이곳에 와서 기차표를 구하여 딸들이 기다리는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한다.
그녀는 나에게 리튼호텔은 비싸니 부근의 절반 값인 아스토리아호텔로 옮기는게 좋다고 조언을 해주고 식사는 부근의 빵가게에서 샌드위치로 해결한다고 하면서 아스토리아호텔 부근 케틀린 제과점은 켈커타에서 최고의 맛을 자랑하는 빵집이라고 알려주었다.
보통 힘든 정도를 훨씬 뛰어넘어야 하는 인도 여행을 혼자서 어린 두 딸을 데리고 강행하고 있는 그녀의 능력을 내심 인정하면서 밤에 하우라 역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남은 시간을 활용하기 위해 빅토리아기념관을 찾았다.
하우라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후글리 강을 건너야 하는데 차들이 무척 붐비어 쉽게 빠지질 않았다. 자동차, 마차, 인력거 등이 수많은 인파와 서로 뒤엉켜 혼잡하기 이를데 없는 켈커타는 10만명이 노숙하는 사람들이라는 도시답게 어두워지자 길에서 잠을 청하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부다가야로 가는 「둔 익스프레스 」특급열차는 밤 8시15분 출발로 되어 있으나 출발부터 2시간 45분이 지나 11시에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인도 기차가 이렇다.
왜 기차가 늦게 떠나는지에 대해 궁금증도 없고 불평도 없는 모습들이다. 모두들 탑승하기 위한 플랫홈 바닥에 빽빽하게 주저앉아 기다리고 있을 뿐 조용하기만 하고 표정없는 얼굴들이다.
인도의 켈커타시 하우라역의 밤은 언제 들어올지 모르는 기차를 기다리며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잃어버릴 것을 염려하여 배낭을 맨 채 줄곧 서 있는 나에게 한 인도인 청년이 그들 가족이 앉아 있는 돗자리에 앉기를 권해 왔다. 켈커타에서 직장에 다니고 있는 자신을 보러 오신 부모님을 배웅하기 위해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아마도 상당수가 전송 나온 사람들로 어떤 면에선 아직도 소박한 정을 나눌 줄 아는 인도인들의 모습으로 보였다. 순간, 미얀마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공항건물 옥상에서 손을 흔들며 전송하고 있던 광경이 떠올랐다.
오전에 철도예약센타 앞에서 만났던 그 여성을 다시 만났다. 어린 두 딸은 산뜻하고 예쁜 원피스를 입고 한 묶음씩 꽃다발을 안고 있다. 인도 여행을 통하여 얻는 경험 이외에도 아름다운 여행의 추억을 남겨주기 위한 마음씀인 듯 하다.
톨스토이, 빅토르위고, 로망롤랑, 칸트, 모짜르트, 괴에테는 그들의 어린시절 여행의 경험이 그들 인생의 진로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회고했던 점이 떠올랐다.
남편은 왜 함께 오지 않았느냐고 묻자 "한사람은 돈을 벌어야 한다"며 명랑하게 웃는 그녀의 유머에 함께 웃고 말았다.
기차가 하나씩 들어오면 인도인들은 서로 밀치면서 우르르 몰려들어 기차에 오른다.
마침내 가야행 기차에 올라 좌석을 찾았다.
막 자리를 잡고 있는데 키는 장대같이 큰 젊은 서양 여자가 거의 몸 부피만큼이나 커 보이는 배낭을 벗어서 훌쩍 들어 이층 침대로 던진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는 모르지만 자세히 훑어보니 쭉 뻗은 체격에 틀림없는 전형적인 수퍼모델이다. 바지는 착 달라붙은 승마복 같이 보이는 옷을 입고 거기에다 끈이 달린 긴 장화같은 가죽구두를 신었다.
마치 쇠로 만든 갑옷을 입은 느낌으로 어느 누구도 접근할 수 없도록 한치의 틈도 보여주지 않는 옷차림이다.
독일에서 왔다고 하는 이 여성은 윗층 침대에서 발을 밑으로 뻗어 내리고서 간단히 수첩에 메모를 하고 있다. 밑에 있는 사람에게 실례나 불편을 주는 것은 조금도 개의치 않는 눈치이다. 내가 고개를 내밀고 잠시 바라보니까 발을 올려서 자리잡는다.
한참 있다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길래 다시 올려다 보았더니 커다란 세파트나 도사견을 묶는 튼튼한 쇠고리로 배낭을 침대를 천장에 걸어 놓은 기둥에 묶으면서 생끗 웃는다.
웃는 모습을 보니 나이도 아주 젊고 나이 못지 않게 순진한 여성임을 일순간에 알 수 있다.
"인도 사람이 다 되었구나"하고 말을 던졌더니 금방 알아듣고 "여행 할 때는 이렇게 해 놓아야 안심이다"고 대답한다. 인도인들은 연약한 몸짓으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커다란 가방을 둘러메고 다니면서 기차에 오르자마자 굵은 쇠줄로 가방을 의자 다리에 묶어 놓는다.
값진 구두이기 때문인지 벗을 생각도 않고 그대로 신고 잠을 잘 태세다. "혼자 여행하느냐?"고 물으니 "혼자 여행하는게 자유롭고 간편하지 않느냐."고 대답한다.
방콕에서 동남아를 여행하고 켈커타로 들어와 바라나시로 가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구경할 것도 많은 힌두 제일의 성지 바라나시를 보려고 하는 것은 쉽게 이해가 간다.
나는 불교 제일의 성지 부다가야를 가기 위해 가야에서 내린다고 하면서 같이 구경가자고 말을 건내 봤더니 반응이 냉랭하였다.
기독교 세계에서 살던 여성이고 보니 불교에 흥미를 갖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녀는 인도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인도 여행은 가능한 한 빨리 마칠 계획이라고 말한다.
그래도 내가 새벽에 가야에서 내릴 때는 시종 잠에 떨어져 있던 걸로만 생각했던 그 여성이 일어나서 즐거운 여행을 하라고 작별 인사를 한다.
완전무장을 갖춘 쌀쌀한 전사의 모습이지만 그녀는 상냥한 마음씨를 갖고 있는 서구 여성이었다.
창 밖은 깜깜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밤길을 달리는 기차에서는 수면을 취해둘 필요가 있다.
잠시 눈을 붙이는가 했더니 비뿌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켈커타에서 가야까지 기차로 8시간 이라지만, 시발역에서 이미 약 3시간 늦게 출발했고 또 몇 시간 더 걸려 도착될지 모를 일이다. 예정 대로라면 도착지에는 1시간 이상은 더 가야 되는 시각이다.
가야지방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비가 좀 내렸는지 들판에 물이 고여있는 것이 보인다. 경작지는 대부분이 논으로 벼가 자라고 있다. 인도는 대체로 비가 많이 내리지 않는 메마른 지역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큰 강 주변에는 대규모의 광대한 벼농사 재배단지가 조성되고 있다고 들었는데 여기가 그런 지역인지 모른다.
지도상으로 볼 때는 큰 강이 흐르는 곳은 아니지만 상당히 큰 개울이 자주 보이는 것으로 보아 이곳은 수량이 풍부한 곳 인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낮은 산들이 기차길 옆으로 30여분 달리는 동안 이어진다. 바윗돌이라고는 보이지 않고 약간의 구릉지대를 이룬 산에는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잡목으로 이루어진 산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 칡넝쿨도 길게 늘어져 있다. 우리와 다른 점이 있다면 12월 말 한 겨울인데도 울창한 녹음이 우거져 있다는 것뿐이다.
어젯밤 내내 추워 떨었다. 인도인들은 제법 두꺼운 담요를 덮고 있었다. 창문이 대부분 고장나 달리면 달릴수록 창문은 열리는 것이었다. 몇 번 닫으려고 시도했지만 결국 나도 포기하고 말았다. 밤이 깊어 가면서 뼈속까지 찬바람이 스며들었다.
한기를 느끼며 가야 기차역에 내리니 실비가 내린다. 비가 왔었는지 길은 질퍽질퍽하고 더럽고 고약한 냄새가 끼쳐온다. 켈커타로 돌아가는 표를 구해놓기 위해서 조금 지체한 뒤 밖으로 나오니 택시, 스쿠터, 릭샤, 기사들 이십여명이 에워싸며 제멋대로 요금을 말해왔다.
일단 릭샤로 가야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가야 버스역에 당도하니 어린 아이들이 치솔나무 묶음을 팔기 위해 따라붙는다. 치솔나무로 칫솔질을 하면서 낯선 이방인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인도인들, 현대문명의 공해 속에서 생활하는 우리와는 다른 가난하면서도 낙천적인 삶의 모습이 그곳에 있었다.
승용차도 아니고 트럭도 아닌 이상하게 개조된 합승차는 6명쯤 탑승하면 될 듯 한데 열명을 태우고 3명은 매달린 채 달린다.
마치 전쟁의 상흔처럼, 벽돌로 지어진 칸막이 뿐인 허물어져가는 집에서 찌들린 더러움을 당연시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한평 정도의 다닥다닥 연이은 가게들에선 무엇인가를 걸어 놓거나 늘어놓았지만 유독 한 가게의 싱싱한 인도 야채가 시선을 끈다.
가야에서 부다가야로 가는 길 오른쪽은 비옥한 평야로 논, 밭 초지등이 어우러져 있고 왼쪽은 라이란자나강이 흐르고 있다. 시달다가 고행했던 곳도 이 라이란자나강 부근이겠지... 강은 수량이 풍부하지만 어떤 곳은 사람들이 줄지어 걸어서 건널 만큼 얕으막한 곳도 있다.
땔감을 머리에 이고 가는 사람들, 검은 염소떼를 몰고 가는 깡마른 여인, 달구지에 빽빽이 실려가는 사람들, 소똥을 넓적하고 둥글게 만들어 담벽에 붙여 말리고 있는 광경, 어슬렁거리는 소떼들은 수 십년전 우리의 가난했던 농촌의 모습을 그리게 한다.
가면 갈수록 인적이 드문 고요한 평온만이 펼쳐져 있을 뿐이다. 이따금씩 성지를 순례하러 가는 듯 지팡이를 짚고 허름한 옷을 입고 천천히 길을 가는 길손의 모습엔 성자의 풍모가 어려있다.
바로 이 길을 따라 그 옛날 수도승들이 걸어갔던 것일까? 그 옛날 석가도 이 강변에서 진리와 구원의 길을 찾기 위해 금욕생활을 하였고 현장, 혜초와 같은 구법승도 이 길을 걸어갔을 것을 생각하니 불교 제일의 성지 부다가야를 찾아가는 감회가 새로워졌다.
- 1998년 9월 (118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