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기행(16)


동문특별강좌 인도기행(16)

작성일 2005-02-19

< 대영제국의 영광을 과시한 빅토리아기념관 >

이윤희 (사학21회, 문학박사·서일전문대학 교수)

---- 영국지배의 어두운 잔재를 간직해 놓은 채 다시 슬픈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으려는 인도국민의 역사의식이 돋보여...

캘커타 시내관광을 계획하고 셰익스피어 사라니에 있는 벵골 관광안내소를 찾아 갔으나 오전 8시 출발인 관광버스는 이미 떠나버린 후였다.
오늘밤 부처님이 득도한 부다가야로 출발하기 전, 남은 시간을 활용하기 위해 「빅토리아 기념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캘커타의 거리는 대부분 좁고, 청결한 분위기와는 매우 거리가 멀다. 통행로는 실로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인도 최대의 도시이며 주요한 항구인 캘커타는 간지스강의 지류인 후글리강 동편에 위치해 있으며 벵골만의 상류지점에 있다. 캘커타는 동부 인도의 중요한 중심지이고 서벵골의 수도이면서 영국이 인도를 지배하는 약 200년동안 35년을 제외하고는 캘커타가 줄곧 인도의 수도였다.
켈커타는 교육을 위해서는 유리한 지점이지만 저지대이며 늪지대이며 덮고 습기가 많은 강변에 위치해 있으므로 이상적인 주거환경이 못된다. 엄청난 슬럼지구에 주민의 약 ⅓이 살고 있다. 극심한 주택부족 현상에 대부분 조그만 오두막집이고 단층집으로 환기도 제대로 안되며 거의 허물어 질 것같은 낡은 집들이다. 위생시설을 갖추지 못하고 그들에게 열려있는 공간은 거의 없어 보인다. 정부가 이 슬럼가 정화운동을 돕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가난 구제는 나라도 못한다’는 말이 있듯이 주민 스스로가 생활을 향상시기려는 각성과 노력이 없다면 켈커타의 슬럼가는 계속 존속될 것만 같았다.
켈커타의 도시 전경은 급격히 변화되어 왔다. 켈커타 중심부의 초우림기 지역은 한때는 대궐같은 집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으나 오늘날에는 사무실, 호텔, 상점가에 자리를 내 주었다. 켈커타의 북쪽 중앙지점은 건물들이 아직도 2∼3층의 높이로 있는데 남부지역은 높은 아파트들이 계속 세워지고 있었다.
UBSPD로 찾아가 책을 구입하자 여러 권의 책을 한묶음으로 묶어 주는데 사용된 것은 수십갈래 가는 실이 새끼줄처럼 얽혀진 끈이었다. 아주 질겨 보이고 포장끈으로 사용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켈커타는 세계 최대의 황마가공지로 밧줄, 포대, 생산지로 유명할 뿐만 아니라 식품가공, 양말, 신발생산, 섬유, 철강제품으로서도 명성을 갖고 있다.
서구의 영향은 켈커타의 기념비적인 건축물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옛총독 관저였고 현재 주지사 관저인 라즈바반은 영국의 케들스턴 건물을 모방한 것이고 고등법원은 벨지움의 섬유조합건물을 닮고 있다. 聖 바울교회는 인도식과 고딕식이 융합된 건축양식이다.문학인의 집은 고딕식 건축이고 인도 박물관은 이탈리아 건축양식이다.
대형 돔을 가진 중앙우체국은 그리스의 코린트식 건축양식을 닮고 있다. 사이드비나르 아름다운 기둥은 165피트 높이인데 그 아래 부분은 이집트식, 원주는 시리아식, 둥근 지붕은 터키식이다. 나코다 이슬람사원은 아그라 부근의 아크발대제 묘를 모델로 하고 있다. 비를라 천문대는 산찌의 대탑을 근거로 하고 있다.
서벵골 입법의회는 근대 건축양식으로 된 우아한 건물이다. 라마크리슈나문화관은 독립이후의 건축물로서는 매우 중요한 형태로서 북서 인도에서 볼 수 있는 고대 힌두 궁전 건축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건물은 빅토리아기념관이다. 서양과 동양의 영향은 켈커타의 건축물에 융합되어 있는데 그 가장 훌륭한 건축물의 하나인 빅토리아기념관은 서양의 고전양식에 무갈 건축양식이 융합된 것을 나타내고 있다. 나는 이 기념관을 찾으면서 잊을 수 없는 은사 金成植교수님을 떠올리고 있었다. 내가 빅토리아기념관을 기억하게 된 것은 옛날 대학시절 강의 시간에 은사님께서 인도에 가서 빅토리아기념관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신 것이 계기였다.
선생님께서는 인도가 독립한 지 몇십년이 지났지만 빅토리아기념관에는 인도를 착취했던 역대 영국인 총독들의 석상이 너무도 당당하게 서 있다는 것을 들으셨다면서 인도인들의 투철한 역사문화의 보존의식을 칭찬하셨다.
선생님께서 아직 살아계신다면 '서울의 옛 총독부 건물( 국립박물관 )을 단숨에 허물어 버린 것을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하고 나는 가끔 의문을 갖는다.
빅토리아기념관은 커즌총독이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에게 바치기 위해 지었지만 정작 여왕은 완공 1년 전에 사망해 버리고 말았던 바로 그 건축물이다.
커즌 총독은 인도에 부임했던 수십명의 역대 총독 가운데서 가장 탁월한 능력을 소유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장 인기없는 인물이기도 하였다. 놀라운 지성의 소유자이며 극도로 오만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 영국의 최고 명문학교인 이튼 및 옥스포드의 벨리올 칼리지 출신으로서 그의 박학한 지성은 광범한 세계여행에 의해 상당부분 형성된 것이었다.
그는 그리스, 로마, 이집트 등을 광범위하게 여행하면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문화유적에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들 문화재들이 돌보는 사람없이 방치되고 있는 데 대해서 가슴아파하고 있었다. 또한 그는 동남아시아와 한국, 중국, 일본에까지 방문하여 상세한 여행기를 남기기도 하였다. (커즌 여행기는 나종일교수 譯 「 100년 전의 여행 100년 후의 교훈 」으로 출판했음.
커즌은 39세에 인도총독으로 임명되기 전에  이미 副印度相, 副外相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自他가 인정한 비범한 두뇌와 뛰어난 행정능력으로 일찍부터 미래의 대영제국수상으로 기대되는 인물이었다.
커즌은 가장 탁월한 인도총독으로 일컬어지면서도, 벵골주를 분할함으로써 인도 국민으로부터 민족주의 세력을 분열시키는 책략이라고 하여 거센 반발을 받았었다. 그러나 그는 다방면에 걸쳐 매우 의욕적이고 적극적인 정책을 추진하였지만 여기에서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가 인도의 고전미술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점이다. 그는 인도의 문화유적 유물을 관리보존하는 것이 총독정부의 책임이라고 언급하면서 문화재 보호법을 제정하여 문화재들이 훼손되는 것을 막았다.
그는 타즈마할, 산찌대탑, 아잔타와 엘로라의 석굴, 마두라와 탄조트의 사원 등 인도 전역에 걸친 대표적인 문화재들을 답사한 후 보수를 명하기도 하였다.
그는 문화재를 발굴하고 보존하는 데 필요한 정부의 예산을 이전보다 열 배 이상이나 증액하여 이 방면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특히 문화유적의 실태를 조사하고 복원하는 일을 죤 마샬 경에게 맡겼는데 그는‘인도 고고학의 아버지’로서 후일 그 유명한 인더스강 유역의 모헨조다로와 하라빠 유적의 발굴을 지휘했던 인물이었다.
빅토리아기념관은 회색빛의 육중하고 당당하면서도 전체적으로 조화롭고 품격이 돋보이는 석조건물이었다. 정면의 일곱계단 아래로 5 m 넓이 현관, 다시 다섯 계단 밑에 2.5 m의 현관, 다시일곱계단 밑에 2.5 m 쯤의 현관 아래 두 개의 계단이 있어, 내려오면서 넓어지는 구조로 되어 안정감있게 뻗어내린 계단이 건물전체를 짜임새있게 받치고 있었다.
기념관 입구 오른쪽 창문 위에는 앉아 있는 여왕과 서 있는 열 세명의 대신들이 조각되어 있고, 왼쪽에는 마차를 타고 있는 여왕과 뒤에 기마호위병들이 조각되어 있어 영국왕실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건물 마지막 계단 아래로부터 10 m 가량 분홍빛 차들이 가득 깔려 있는 것도 정갈스러워 보였다.
기념관의 앞뜰에는 빅토라아여왕의 좌상이 보기좋게 청동으로 만들어져 있고 방문객들이 그 곳에서 연이어 기념촬영을 한다. 넓은 잔디밭과 입구 양편으로 호수가 있어 영국풍의 조그만 궁전을 연상케 하였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기념관에 들어가기 위해 줄 서 있고 음식을 준비해 와 잔디밭에서 먹고 있는 사람들도 눈에 띤다. 호숫가 벤취에도 빈 좌석은 찾을 수 없었다.
입장료는 우리 돈으로 60원 정도이다.
출입구 안쪽에 빅토리아 여왕( 1837-1901 )이 사용했다는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홀 중앙에는 오른 손에 여왕봉을 쥐고 왼손엔 둥근 그릇을 받치고 있는 커다란 여왕의 흰 대리석상이 아름답게 조각되어 있다.
쳐다보아야 할만큼 큰 상인데, 아름다운 모습이면서도 대영제국 전성기에 세계를 호령했던 늠름한 기품과 권위있는 자태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기념관 내부의 조명은 밖에서 보기에도 웅장한 돔의 지붕을 통해 들어오는 자연광선을 이용하여 밝게 해 주고 있었다.
빅토리아여왕과 남편 엘버트공의 전신사진이 걸려 있고 에드워드 7세가 자이푸르에서 코끼리 행렬하는 그림이 걸려 있었다.
여러 사람들의 手書가 보관되어 있었는데 빅토리아여왕의 필체는 썩 달필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300년 전에는 캘커타가 어촌이었던 그림, 영국통치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던 플라시전투 ( 1757.6.23 )에 사용한 야구공크기의 대포알, 타고르가 받은 노벨문학상 기념 메달 사진, 타고르 할아버지가 빅토리아여왕으로부터 받은 훈장( 메달식 여왕초상화 ), 암리싸르시의 자야왈리안공원 학살사건에 반대하여 타고르가 훈장을 총독에게 다시 돌려 보낸다는 편지 등이 정연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 근대 인도의 아버지 ’로 불리는 람 모한 로이 등 인도의 선각자들을 큰 액자에 그려놓고 있었다.
빅토리아기념관에 여왕의 입상, 좌상등의 초상화가 많이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만 수많은 역대 총독가운데서 인도 내의 영토확장정책에 몰두했던 총독들의 입상을 세워 놓고 있는 것이 특이하였다. 클라이브 벵골지사, 웰슬리 총독, 로우더 헤이스팅스, 달하우지 총독 등이 무자비할 정도로 인도의 토우국가들을 병합하는데 몰두했었던 인물들이었다.
클라이브는 벵골지방을 정복함으로써 영국의 인도지배 역사를 열었던 인물이었다. 벵골지사로 재직하면서 인도 원주민을 혹독하게 착취했고 예물이라는 이름으로 원주민으로부터 엄청난 재화를 취득했다. 동인도회사 직원들이 원주민을 희생시키며 사무역에 참여하여 막대한 재화를 취득하는 것을 그대로 방치하였다. 그의 지배가 끝난 후 벵골지방은 인도역사상 가장 처참한 기근을 맞이하여 주민의 ⅓, 약 일천만명이 아사하는 참사가 뒤따랐다.
빅토리아기념관에는 인도국민의 입장에서는 가장 원한이 서린 인물이라고 볼 수 있는 클라이브의 석상이 빅토리아여왕다음으로 크게 버티고 서 있다. 인도가 독립한 지 반세기가 지났으면서도 인도인들은 빅토리아기념관을 옛날 그대로 보존해 놓고 있는 것이다.
제국주의 착취자들의 석상이 당당하게 서 있고, 어찌된 일인지 벽에는 위대한 독립운동가인 마하트마 간디와 네루의 초상화가 초라할 정도의 모습으로 걸려 있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나는 선뜻 납득이 가지 않는 이 광경이, 인도 국민은  부끄럽고 슬프고 욕된 역사라 할지라도 이를 단순히 망각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이를 보존하여 생생하게 기억시킴으로써 다시는 오욕의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겠다는 좋은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  1998년 7월 (117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