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기행(15)


동문특별강좌 인도기행(15)

작성일 2005-02-19

< 문학과 예술의 도시 캘커타 >
   
이윤희 (사학 21회, 문학박사· 서일대학 민족문화과 교수)
 
----- 리드 : 오랜 전통을 간직한 벵골지방의 문학과 예술활동은 타고르에 의해서 절정에 이르고......

인도 최대의 도시이며 인도에서 가장 훌륭한 문화 중심지인 캘커타를 한 번은 꼭 찾아보리라던 희망이 이루어져 나는 캘커타에 갈 수 있었다.
캘커타는 근대 인도의 문학 및 예술적 사고와 인도 민족주의의 탄생지이다. 캘커타 시의 기원은 1687년 가을 영국 동인도 회사의 대리인 차르녹이 무갈 왕실로부터 수타나티에 근거지를 세울 것을 허락받아 여기에 윌리암 城이 건설되면서 시작된다.
캘커타라는 이름은 나중에 새로운 商館이 되는 세 개 마을의 하나인 벵골어 칼리카타에서 유래되었다. 상관은 포르투칼, 화란, 영국, 프랑스 등의 동인도회사 상인들이 무갈제국의 허락을 받아 일정한 지역에서 생활하며 상업활동을 하는 곳 이었다. 무갈정부는맨처음 영국상인들에게 아라비아海에 연해있는 수라트에 상관을 설치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으나 곧이어 봄베이(뭄바이), 마드라스(St, George), 캘커타(Fort William) 등에 상관이 설치됨으로써 이 세 지역이 영국 동인도회사의 세력 근거지가 되었다.
300년 역사를 통하여 한 개의 단순한 어촌에 불과하였던 캘커타는 일천일백만의 인구를 가진 인도 최대의 도시로 성장하였다.
캘커타 도시구조의 가장 특징적인 양상은 남북으로 직사각형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옛날 유럽인이 살았던 도심지를 제외하고는 이 도시가 임의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도시의 위치는 원래 쉽게 방어할 수 있는 지점 이고 부분적으로 교역에 유리한 장소라는 것 때문에 선택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았다면 저지대이고 늪지대이며 덥고 습기가 많은 이 강변 지점이 도시로서 선택될리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이 무질서하게 발달한 것은 市 주변지역과 하우라 교외에서 특히 눈에 띤다.
캘커타 전체로서는 인구가 조밀하고 주거지역이 몹시 협소함에도 불구하고 시민의 휴식공간을 위해 200개가 넘는 공원과 광장이 마련되어 있다. 길이가 3km 폭은 1.5km를 가진 마이단이 가장 잘 알려진 개방된 공간인데 이곳에 크리켓 하키운동장이 마련되어 있다. 마이단 옆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크리켓운동장의 하나인 란지스타디움이 있다. 메타지스타디움은 실내경기를 위해서 마련되어 있다. 시 동쪽에 건설된 솔티레이크스타디움(소금호수)은 10만 관중을 수용할 수 있다. 또 시에는 몇 개의 경마, 골프장이 있고 보트장이 있다. 이외에도 많은 스포츠 클럽 센타를 가지고 있으며 시민들을 축구, 크리켓의 열렬한 펜이다.
캘커타는 광범한 분야에 걸쳐 30개 이상의 박물관을 가지고 있다. 1814년 창설된 인도 박물관은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고 가장 큰 박물관이다. 고고학적 역사적 유물, 화폐 부문에 있어서는 특별히 값진 것을 보유하고 있다. 캘커타 대학교의 에스토시 박물관은 특히 벵골지방의 민속예술품을 전시하고 있다. 캘커타대학교의 도서관은 많은 자료를 보존하고 있는데 특히 국립도서관은 인도에서 가장 큰 도서관으로 희귀한 책과 필사본을 보유하고 있었다. 
캘커타는 1757년에서 1912년까지 영령인도의 수도로서의 기능을 해왔으므로 많은 건물이나 기념비에서 서양식의 건축양식을 볼 수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동서양의 대표적인 건축양식을 절충해 놓은 문학인의 집과 빅토리아 기념관은 찿는이에게 그 위용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캘커타는 무엇보다도 강력한 문학적, 종교적 정취를 듬뿍 안고 있는 도시다. 인도 문화를 유지하기 위한 시민들의 열성적인 노력은 다른 지역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적극적이다.
캘커타는 교육과 문화의 중심지로서 벵골어, 영어, 힌디, 모슬렘어를 자유롭게 구사함으로써 세계시민의 요구에 부합하고 있다. 1857년에 설립된 유서깊은 캘커타대학교는 학생 수가 약 30만에 육박하는 거대한 대학으로서 벵골지방의 대학교육을 담당해 왔으며 또 다른 대학으로 쟈다프르, 라빈드라바라티 등이 있다.
수세기동안 동·서 문화의 융합으로 캘커타의 문화 생활에 도움을 주고 있는 수많은 다양한 기관들의 창설을 조장시켰다. 3개 대학 이외에도 아시아 학회, 벵골문학회, 라마크리슈나문화연구소, 미술대학, 비를라예술문화대학, 마하보디소사이어티등.
캘커타 사람들은 오랫동안 문학, 예술을 추구하는데 있어서 능동적이었다. 19세기 중엽에 시작된 문예운동은 인도 전역에 걸쳐 문화적 르네상스를 촉진시켰다. 이 운동에 최고의 창도자는 1914년 동양인으로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라빈드라나드 타고르이다. 그의 시, 음악, 드라마, 미술에 있어서 눈부신 창의성은 이 도시의 문화생활을 계속 풍부하게 만들고 있다.
타고르 집안은 영국의 식민통치 아래서 지배자와 결탁하여 엄청난 재산을 축척한 표본적인 집안이지만 라빈드라나드 타고르는 민족의식이 투철한 인물이었다.
그는 일련의 강연을 통해서 청년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커어즌 인도 총독의 벵골 분할정책에 반대하여 대대적인 스와데시(토산물 애용)운동이 전개되었을 때 타고르는 애국심에 편승하여 스와데시 상점을 열기도 하였다.
벵골 문학의 절정은 詩聖 타고르의 신앙열이 넘쳐 흐르는 詩로 승화되었으며 그의 유명한 시들은 원래 이 고장의 토속어인 벵골어로 쓰여진 것들이었다.
벵골인들은 벵골어가 가장 우수한 언어로 믿고 있으며 벵골어로 쓰여진 훌륭한 문학작품들에서 자부심을 갖게 하고 있다.
캘커타는 이 나라에서 예술운동의 전위역할을 담당해오고 있으며 몇 개의 예술과 모임은 매년 정기적인 작품 발표회를 지속하고 있다.
캘커타는 또한 전통적인 또 현대음악과 무용의 중심지이다. 1937년 타고르는 캘커타에서 처음으로 전 벵골 음악회를 개최했다. 그 후로 수많은 인도 고전 음악회가 해마다 열리고 있다. 수많은 고전 무용가들의 고향이기도한 캘커타는 우다이 산카르가 서양의 연극 기법을 인도의 전통부문에 적용하려는 실험을 하고 있는 곳이다. 그가 세운 무용, 음악, 드라마 학교는 1965년 이래 이 도시에서 존속해 오고 있다.
국립극장이 건설됨으로써 전문적인 연극이 캘커타에서 시작되었다. 근대적인 드라마 형태는 찬드라 고쉬와 디라반두 미드라 같은 극작가들에 의해서 이 도시에서 시작되었다. 캘커타는 아직도 프로 및 아마추어 무대의 중요한 중심지이며 실험주의 중심지이고 인도에서 영화산업의 출발지역이 되었다. 셋티아지트 레이와 미리날센과 같은 전위 영화감독은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도시에는 20여개의 영화관이 있으며 항상 영어, 벵골, 힌디어 영화를 상영하고 있는데 인도영화는 세계에서 양적인 면에서 두 번째로 미국을 따라가고 있다. 인도 영화의 주제는 거의 예외없이 사랑의 이야기로 매우 역동적인 뮤지컬로 스토리를 전개해 나가는 것이 인상적이다.

- 1998년 6월 (116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