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특별강좌
인도기행(11)
영욕(榮辱)의 역사를 간직한 천년의 고도(古都) 델리
(이윤희, 사학21회, 문학박사·서일전문대학 교수)
--- 천년의 古都에는 무갈왕실의 榮華와 함께 한편으론 현실적인 貧困이 드리워져 있고....
델리, 보통 오올드 델리로 불리는 이 곳은 북동쪽 레드 포오트 성체를 중심으로 옛부터 이어진 서민 생활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이곳은 각종 상점이 모여 있고 금, 은, 상아, 보석, 그 밖의 수공업이 성한 곳이다. 17세기 무갈제국의 인도. 이슬람 문화를 대표하는 커다란 모스크(이슬람 사원)가 있고 구왕정, 라우드켈라의 요세와 인도의 대표적인 델리대학이 있다. 쟈므나 강기슭에는 뉴델리와 접하는 곳에 감동적인 인도 독립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마하트마 간디와 자와할랄 네루의 묘가 자리잡고 있어 인도 역사의 발자취가 간직된 곳이다.
델리는 9세기 경에 하나의 도시로 성장한 곳으로 알려져 있지만 서북쪽에서 밀려드는 모슬렘이 힌두세력을 격파한 12세기 말부터 이 곳은 정치적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기나긴 인도 역사에서 암흑시대로 일컬어지기도 하는 수많은 단명(短命)의 모슬렘 왕조들의 근거지가 대체로 이 델리였다.
델리가 최대의 수난을 당한 것은 14세기 말 챠가타이 한국(汗國)의 티무르에 의해서 였다. 티무르는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델리에 입성하여 자신을 인도의 왕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는 병사들이 도시를 유린하는 것을 묵인하였으며 델리에서는 대대적인 약탈과 학살이 난무하였다.
티무르는 몇 세기 동안 축적되어온 인도의 재화를 그의 수도 사마르칸트로 가져갔으며 동시에 수만명의 인도 여인과 노예, 그리고 그의 궁전을 세우기 위한 건축가들을 살아 있는 전리품으로 끌고 갔다. 티무르는 델리에 불과 2주일 동안 머무른 후 돌아갔지만 그의 뒤에는 무정부 상태와 기근과 전염병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인도 모슬렘 왕조의 영광인 무갈제국의 사자한 왕때 축조된 레드 포오트는 달라라르키라 라고 부르는 구시가 제일의 명소에 자리잡고 있다. 1648년 축조된 레드 포오트의 성벽은 붉은 빛깔의 사암(砂岩)으로 만들어져 잇고 <붉은 성>으로 불리워져 독일 하이델베르크에 있는 붉은 갈색의 위풍당당한 하이델베르크 옛 성이 떠올랐다.
붉은 성 정문 앞 넓은 광장의 잔디밭은 흡사 실업자들의 휴식처인듯 대낮인데도 수많은 사람들이 잔디밭에 누워 잠자고 있거나 우두커니 앉아 있기도 하고 몇 명씩 모여 앉아 놀이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그들에게는 가난함과 현실에 묵묵히 순응하는 고행자의 모습, 가난하지만 선량함이 어려 있었다.
아아치 모양의 라호르 문을 들어서면 넓은 뜰과 정원이 있지만 잘 가꾸어져 있지 않았다. 성 안에는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장식품 디완에암, 대형 연꽃잎 조각, 왕좌, 욕실등 볼만한 것이 많다.
붉은 성 안에 있는 알현의 궁전 디완에 카아스는 흰 대리석 기둥의 우아한 아름다움, 천정의 정교한 조각, 내부의 벽에는 보석이 많이 박혀 있고, 공작의 방에는 수천 개의 다이아몬드, 사파이어, 루우비, 에머랄드로 수놓여져 있고 금과 은으로 풍부하게 장식되어 있었으나 이러한 보물들은 정복자에 의해 약탈되고 말았다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궁전이었다. 이 궁전 입구 아아치 위에는 <만일 지상에 극락이 있다면 그곳은 다름 아닌 이곳이니다>란 유명한 글이 새겨져 있다.
특히 왕이 거쳐하던 방은 아름답기 그지없어 독일에 있는 꿈의 궁전 노이스반슈타인의 루드비히 왕의 침실 - 14명의 조각가들이 4년에 걸쳐 완성한 사치스런 침실이 떠올랐다.
세발 달린 스쿠터가 약간 불안해 보이고 위험스러워 보이기도 하지만 요금은 대체로 택시요금의 반값도 안되고 여행객인 나에겐 색다른 기분도 들고 가림이 없어 바깥 풍경을 보는데는 오히려 시원한 재미도 있었다.
진주 회교사원 부근이 인도의 재래시장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전통적인 닭시장이 있고 생선시장은 모두 큰 나무상자에 얼음과 함께 담아논채로 팔고 있었다. 반달같이 두툼한 칼을 세워 놓고 칼로 고기를 써는 게 아니라 고기를 고정해 놓은 칼에 데서 썰어 주고 있었다. 시장엔 슬리퍼, 구두, 운동화등 신발류도 다양하건만 맨발의 인도인들은 그냥 그 더러운 길을 아무렇지 않게 밟으며 다니는 사람도 많았다.
닭시장의 역겨운 냄새와 불결함은 너무나 심각하였다. 그 불결한 속에 검은 피부의 인도인들의 눈망울이 더 커 보이고 검은 눈썹은 더 검어 보이면서 그 곳을 빨리 지나 다른 곳으로 가고 싶었다.
델리대학은 오올드 델리의 맨 북쪽에 넓다랗게 자리잡고 있다. 교정 안에 여러갈래의 도로가 연결되어 있어 시내버스와 승용차들이 달리고 있으므로 나는 택시로 달리면서 자신이 이미 켐퍼스 안에 진입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행정 본관이라고 해보아야 특별히 눈에 띠는 건물도 아니고 인문대학 건물은 오래 전에 들렸을 때보다는 몇 채의 건물이 첨가되었을 뿐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이미 1857년에 칼카타, 봄베이, 마드라스에 각각 유니버시티가 설립된 것에 비하면 델리대학은 새로운 행정수도로 뉴델리가 건설된 이후 1922년에야 개교하였다. 학생 수는 약 10만 명으로 칼카타 대학교의 절반 규모도 못되지만 오늘날의 델리대학교는 인도의 중심대학으로 굳건한 위치에 있다. 위의 세 대학교를 비롯한 수많은 큰 대학들의 총장직은 각 州의 지사가 맡고 있지만 델리대학교의 총장은 인도정부의 부통령이라는 점에서도 그 높은 위상을 알 수 있게 한다.
물론 여기에서 총장은 명예직으로 볼 수 있으며 실질적인 총장의 기능은 대학교에 상주하는 부총장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인도의 학제가 영국의 그것을 그대로 답습한 느낌이 드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지만 이 경우도 예컨데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총장이 에리자베스 여왕의 남편인 에딘버더 공작으로 되어 있는 것과 유사하다.
델리대학교는 수많은 칼리지를 포함하고 있지만 특히 경제학부가 세계적 명성을 지니고 있다. 큰 도로변에 자리잡고 있는 國際學舍에서 차 한잔을 마시고 일어섰다.
다시 뉴델리 쪽으로 방향을 돌려 신문사 거리를 지나 후마윤 묘궁으로 갔다. 1560년에 세워진 이 묘궁은 쟈므나 강이 내려다 보이는 높은 언덕 위에 장대한 건축미를 뽐내듯이 서 있다. 무갈제국 2대왕 후마윤 왕의 묘궁임을 알려주듯이 후마윤이 묘궁 중앙에 메카를 향해 누워 있고 왕비 묘는 안쪽에 안치되어 있는데 모두 아름다운 대리석과 정교한 조각으로 만들어져 있다.
무갈제국 1대왕 바베르가 왕자를 위해 목숨을 바치면 후마윤 왕자를 살릴 수 있다는 예언자의 말에 따라 왕자를 위하여 바베르는 죽음의 길을 택한다.
후마윤은 왕위에 올랐지만 유능한 통치자는 결코 되지 못하였고 아마도 그는 천성적으로 철학자의 길을 걸었으면 좋았을 인물이었다. 왕권이 약화되자 선왕에게는 충성심을 보였던 장군들이 독립적인 세력을 키워 나갔다. 특히 쉐르칸은 비하르 지방을 중심으로 세력을 크게 키워 나가고 있었으므로 후마윤은 이의 타도를 도모하다가 오히려 패하여 망명의 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후마윤이 사막지역인 인도의 서북 국경지방을 방황할 때 무갈황제 가운데 가장 걸출한 3대 왕이 될 아크바르 대제를 낳았지만 그는 여기에서도 계속 머무를 수 없어 10여년간 페르시아에 망명하였다. 그는 페르시아에서 학문과 예술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했다. 쉐르칸이 사망하여 그 세력이 쇠퇴하자 후마윤은 귀국하여 왕위를 다시 찾았다. 그는 치국책에 대한 관심보다는 학문에 대한 열의가 강했었던지 밤늦게까지 이층 도서실에서 공부하고 층계를 내려오다 굴러 넘어져서 사망하고 말았다. 왕위를 되찾은 지 6개월도 못되어 일어난 비극이었다.
묘궁의 천정은 페르시아 건축 양식인데 보존 상태가 만들어질 당시처럼 깨끗하여 의아스러울 정도였다. 후마윤 묘궁은 기둥이 맨 밑은 인도 건축양식으로, 중간 부분은 페르시아 건축양식으로, 윗부분은 무갈제국 건축양식을 혼합하여 만들어져 있다. 처음 볼 때는 같은 건축양식인 줄 알았는데 안내원의 설명을 듣고 서로 다른 건축양식임을 조금은 구별해서 볼 수 있었다.
모슬렘 건물은 반드시 음향이 울려 퍼지게 만든다는데 이 묘궁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런 신비한 것은 아그라성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이 곳엔 5대 사자한 왕의 세 아들의 묘와 6대왕 아우랑제브 세 아들의 묘, 이 묘를 건축했던 5명의 페르시아 건축가들의 묘도 간결하게 자리잡고 있다.
묘궁에서 내려다 본 넓은 정원 한 쪽엔 무갈시대 때 건너편 쟈므나 강물을 끌어다 만든 탱크가 있는가 하면 숲속 한쪽엔 후마윤 왕의 이발사의 집이 작은 궁전처럼 육중하게 서 잇다.
후마윤 묘 뒤쪽에서 보면 시크사원이 파아란 하늘 속 숲속에서 둥그스름한 하얀 지붕을 드러내 놓은 양이 흡사 동화 속의 궁전처럼 아름다웠다. 묘궁의 주변 사각엔 아주 높다란 코코넛 나무가 5-6그루씩 균형을 이루면서 시원스레 뻗어 내린 나뭇잎이 더위를 식혀 주려는 듯 나풀거리고 있었다.
- 1997년 11월 (110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