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특별강좌
인도기행(8)
< 아우랑가바드의 미니타지마할을 찾아서 >
이윤희 (사학21회, 문학박사·서일전문대학 교수)
--- 인도 역사상 힌두에서는 가장 포악한 군주로 기록되고 그의 기나긴 재위 기간동안 대 부분을 전쟁으로 보냈던 이처럼 호전적인 군주에게도 거대한 묘를 만들만큼 사랑하는 여인에 대한 애정은 강했던 것인가! ---
아우랑가바드는 서부 인도 마하라스튜라 중서부의 키움江에 자리잡고 있다. 원래 카드키로 알려진 이 도시는 1610년 만리크암바에 의해 건설되었다. 바로 이 도시 안에 아우랑지브는 비비카 마크라바 라는 묘궁을 세웠다.
비비카 마크라바는 아우랑지브왕이 총애했던 왕비 라비야 다우라니를 위해 건립한 것이다. 아우랑지브의 아들에 의해서 완공을 보았던 비비카 마크라바는 부왕 사 자한이 사랑했던 뭄타즈 왕비를 위해 지었던 아그라의 타지마할을 그대로 본뜬 것이다. 50년 늦게 건축되었고 아그라의 타지마할 축소판인 듯 하여 미니 타지마할로 불리우기도 한다. 거대한 묘위에 도움을 얹어 놓은 것이나 좌우에 높은 망루 같은 것을 세워 놓은 것은 타지마할과 흡사하다. 접근하는 길목을 커다란 돌로 깔아 놓고 인공연못을 만들어 묘의 그림자가 물에 아름답게 비추도록 만들어 놓은 것도 타지마할과 닮았다. 타지마할을 사진으로만 보았던 여행객이라면 아! 타지마할이 여기 있구나 하고 착각할 정도다. 그러나 아름다운 타지마할에 매혹되어 세 번이나 가서 꼼꼼히 살펴보았던 내 눈에는 멀리서 언 듯 보아도 그 규모나 모양이나 산뜻함에 있어서 크게 못미친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넓은 정원을 아름답고 정연하게 가꾸어 놓은 것도 타지마할을 연상케 하였다. 비비카 마크라바는 검스레 색이 변한 기둥들로 파아란 하늘 속에 우아하게 서있는 아그라의 우윳빛 타지마할에는 도저히 미칠바가 아니었다.
특히 아그라의 타지마할(인도기행 깊은 사랑이 만들어 낸 환상의 묘궁 타지마할)은 사랑하는 왕비 뭄타즈 마할의 죽음을 슬퍼한 나머지 사 자한이 매일 2만 명을 동원하고 5백만 루피라는 엄청난 액수를 들여 22년 만에야 완성한 것으로 흰 대리석의 산뜻하고 우아한 아름다움으로 인하여 세계적 경이로 일컬어지고 있다. 아무튼 이 감동 어린 타지마할 옆에 사 자한은 자신을 위해 또다른 묘를 세우려고 계획했던 것으로 전해지나 아마도 말년에 그가 패륜아 아우랑지브에 의해 겪은 비운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그 장대함과 아름다움을 세계에 과시하고 있는 타지마할을 축조한 사 자한 왕은 네명의 왕자를 두었다. 아우랑지브는 사 자한의 셋째 왕자였다. 사 자한은 장남 다라수코에게 왕위를 물려 주려 했는데 아우랑지브는 동생 무라드 바크스와 제휴해서 형을 죽이고 사 자한을 퇴위시켜 1666년 사망할 때까지 아그라城에 8년동안 유폐시키고 동생 무라드 바크스도 살해하고 왕위를 차지하였다.
황제의 자리에 오른 아우랑지브는 철저하게 반 힌두정책을 폈고 힌두교도 들에게는 폭군이었다. 힌두의 사원과 학교를 허물어 버리고 아크발 대제가 폐지했던 인두세를 힌두에게 다시 부과하였다. 그러나 아우랑지브는 이슬람주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노력했고 탁월한 행정능력과 강인한 체력을 갖추고 있었으며 신앙심이 깊고 경건했던 사람이었다. 무갈 왕들은 대개 아편에 빠져 있었는데 그렇지 않고 기도와 명상의 시간이 많았고 금욕적인 생활과 절제를 강요하였다.
50년 동안 재위한 무갈 제국의 6대왕 아우랑지브는 마지막 20년을 50만 대군으로 쉬바지의 힌두왕국을 격파하려고 총력을 기울였다. 마라타족의 영웅 쉬바지는 5만 군대로 데칸고원의 험난한 자연환경과 끈질긴 마라타족의 민족성을 이용해서 아우랑지브의 대군을 막아냈다. 아우랑지브는 말년에는 사실상 수도를 이곳으로 옮겨 자신의 이름을 본따 아우랑가바드로 명명하고 마라타족을 소탕하기 위해 총력전을 벌렸지만 결국 전장터에서 병사하고 말았다.
대체로 사 자한 시대의 건축물 구조는 조부인 아크바르와 부왕 자한기르 시대의 기념비들에 비하여 웅장함과 독창성, 남성다움, 육중함 등에는 뒤지지만 사치스런 전시 효과와 풍부하고 기교 있는 장식에는 앞선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세계는 여성적인 우아함을 간직한 사 자한의 타지마할을 그 이전의 혹은 이후의 건축물보다 더 좋아하고 훌륭하게 평가하는데 일치하고 있다. 사 자한의 건축물들은 힘보다는 우아함과 특별히 값비싼 장식품을 아낌없이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특징 지을 수 있다.
아우랑지브는 예술에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에 건축 양식도 보잘 것 없이 조락해갔다. 이 시대에는 뛰어난 수준 높은 건축물을 발견할 수 없다. 그가 데칸의 아우랑가바드에 총애했던 왕비 라비야 다우라니의 묘를 타지마할과 전체적으로 비슷하게 계획하였던 것으로 보이나 우아한 모습은 결여되어 있었다. 그러나 인도 역사상 힌두에게는 가장 포악한 군주로 기록되고 그의 기나긴 재위 기간동안 대부분을 전쟁으로 보냈던 이처럼 호전적인 군주에게도 거대한 묘를 만들만큼 사랑하는 여인에 대한 애정은 강했던 것인가!
부왕 사 자한은 타지마할 안에 먼저 간 왕비 뭄타즈 마할 옆에 묻혔지만, 아우랑지브는 비비카 마크라바에 그의 사랑했던 왕비 다우라니와 함께 묻히지 않았다. 아우랑지브는 엘로라에서 아우랑가바드 쪽으로 오는 조그만 마을에 외로이 묻혀있다.
인도 역사상 마우리아 제국의 아쇼카 대왕 다음으로 가장 넓은 지역을 다스렸던 아우랑지브 황제의 무덤으로서는 너무나 초라하였다. 부왕 사 자한을 아그라성에 유폐시켰던 패륜아로 기록되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의 사망 이후 무갈 제국은 급속한 쇠퇴의 길로 떨어지고 말았기 때문일까......
여유시간이 있어 미니 타지마할 정원 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십여 명의 젊은 여성들이 인도 고유의 의상인 사리를 갖가지 색상으로 아름답게 차려입고 열심히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내가 관심을 가지고 주의 깊게 바라보니까 그들은 낯선 이방인인 나에게 친근한 눈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몇 마디가 오고간 후에 나는 이 미니 타지마할을 세운 무갈 제국의 아우랑지브 황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질문하였더니 그 중에서도 가장 나이도 들어 보이는 선배인 듯한 여학생이 거침없이 그는 위대한 대왕이라고 대답하였다. 나는 직감적으로 이 여학생은 말할 것도 없고 여기 있는 모든 대학생들이 모슬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떤 면에서 위대한 군주인가 다시 물었더니 내가 예측했던 대로 인도의 대부분의 지역을 통일했던 무갈 제국의 역대 왕들 중에서 가장 넓은 판도를 유지했던 왕이 바로 아우랑지브라고 하는 것이다. 또 그 여학생은 미니 타지마할에 잠깐 고개를 돌리면서 마치 무갈 제국의 그 유명한 문화적 업적들이 아우랑지브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아우랑지브 때 무갈제국의 영토가 가장 광대했고 또 그는 어느 왕보다도 모슬렘 신앙에 철저한 군주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위대한 무갈제국시대의 문화에 대한 적극적인 후원자는 결코 아니었다고 반박했다. 오히려 그는 힌두사원과 학교를 허물어 버린 편협한 모슬렘 군주였다고 말하니까 그 여학생은 잠시 망설이는 눈치였다.
나는 이 논쟁을 길게 끌어가고 싶은 마음도 없어서 인도사에 관심을 가진 외국인인 내가 어쩌면 아우랑지브 왕을 보다 더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하면서 웃었더니 그 여학생도 생각보다는 훨씬 넓은 마음을 가진 듯 인도의 힌두와 모슬렘 사이에서는 결코 보기 힘들게 아량을 보이며 같이 따라 웃는 것이었다.
그 동안에 음식을 다 만들었는지 나에게 맨 먼저 한 접시 권하는 것이었다. 나는 한 접시 가득한 음식을 다 먹을 자신도 없어서 사양했지만 막무가내로 들이미는 것이었다. 그 태도가 매우 순진하고 솔직해 보여 더 이상 거절할 수 없는 처지였다. 얼떨결에 받아들고 보니 젓가락이나 숟가락이 없었다. 이들이 젓가락을 사용할 리는 없지만 스푼이 없느냐고 물어 보았더니 왜 묻느냐는 표정으로 없다는 것이었다. 하기야 인도인들이 숫가락없이 직접 손가락으로 음식을 버물러 가면서 먹는 것을 보면 당연한 대답인 것을.
여행하면서 모르는 사람이 주는 음식을 받아먹어서도 안되고 주어서도 안된다는 것은 극히 상식적인 일이다. 나는 이 여학생들이 주는 음식을 받아들고 이 음식에 어떤 마취제가 섞어 있으리라고는 추호도 생각지 않았지만 다 먹어치우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이들의 티없이 맑은 마음씨가 담긴 음식을 도저히 거절할 수는 없었다. 손가락으로 살짝 집어서 맛을 보았더니 진한 향료 맛 때문에 비위에 확 받치는 것이었다.
이 여학생들은 나에게 음식을 건네주고는 그 다음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지 내가 음식 먹는 것을 보려고도 하지 않고 자기들 일만 열심히 하는 것이었다. 음식이 입에 맞지도 않고 스푼도 없어서 쩔쩔 매다가 나는 아차, 호주머니에 있는 명함을 꺼내서 숟가락 대용으로 사용하여 얼른 먹어치웠다. 그때서야 이 여학생들은 "굿 아이디어"라고 말하면서 순진하게 웃는 것이었다.
함께 사진촬영을 하자고 했더니 몇 명이 우르르 몰려왔다. 인도 여성들이 외국인과 함께 사진 찍는 것을 상당히 꺼리는 경향이 있는데 이 여학생들은 꽤 활발한 편이다. 사진을 보내 달라고 주소를 적어 나에게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는 귀국해서 학생 숫자만큼 사진을 보냈더니 고맙다는 답서가 왔다. 사진을 보고 학교에서 돌려보며 웃음꽃을 피웠다는 내용이다. 다음 인도에 들릴 때는 꼭 자기 집에 머무를 수 있고 많은 것을 구경시켜 주겠다고 약속해 왔다. 세계 어디서나 대학생들은 발랄하고 금방 친해질 수 있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아우랑가바드에 있는 공항 대합실은 흡사 우리의 시골 역처럼 조그맣고 한가하였다. 공항 대합실에서 아잔타와 엘로라 엽서 23장을 골랐다. 물건을 팔던 청년이 갑자기 내가 쓰고 있는 볼펜을 줄 수 없느냐고 했다. 약간 고장나 매끄럽지 않다고 해도 좋다는 것이다. 볼펜은 하나밖에 없고 사용해야 된다니까 자신의 것과 바꾸어 달라고 했다. 고장난 볼펜을 저렇게 갖고 싶어하다니... 순간 오래 전 우리 나라 경우 외국에 다녀온 사람들이 외제 볼펜을 선물하곤 했었는데 오늘날 인도의 경제적 수준과 외국 물품에 대한 호기심이 우리 나라 그때와 비슷한 게 아닐는지 하는 생각이 들어 주어버렸다. 필기도구가 없어진 나로서는 난감하였다. 항공사 직원인 듯한 남자에게서 잠깐 볼펜을 빌렸다.. 인도에서 만들어진 그 볼펜은 우리 나라 제품에 비해 훨씬 품질이 떨어져 있었다.
장난감 같이 느껴지는 비행기는 봄베이 국내선 공항으로 나를 금방 데려다 주었다.
- 1997년 7월 (107호) 게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