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원실 박사(부산예치과)
[팜뉴스=김응민 기자] 육체적인 질병이나 고통을 치료하는 ‘의술’과 정신의 치유에 영향을 주는 ‘예술’은 ‘사람을 살린다’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코로나 블루’라는 용어가 생길 정도로 우울감과 무기력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 요즘 의술과 예술의 경계를 넘나들며 환자 치료에 전념해온 의사가 있다. 의사이자 예술가인 허원실 박사의 경력은 단순한 ‘취미 수준’이 아니라, 의사와 치과의사 그리고 미술 분야를 합쳐 총 4개 학위를 갖고 있을 정도로 전문적이고 정통한 수준을 자랑한다.
팜뉴스는 성형외과 의사이자 치과의사이며 동시에 미술가인 허원실 박사를 만나 그의 삶에 관해 이야기를 들어봤다.
# 프로필이 무척 독특하다. 의술과 예술 분야에도 모두 ‘학위’를 소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치과의사였던 어머니와 예술가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두루 받아 심미적인 분야에 관심이 많았다. 사람의 외모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성형외과로 전공을 정한 이유다. 외국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성형외과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또한 경희대학교 치과대학을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턱얼굴외과 석박사 학위 취득 및 전문의 과정을 수료했다. 또한 고려대학교 임상치의과대학원에서 교정과 석사학위를 취득한 바 있다.
예술 분야에서는 홍익대학교 미술대에서 섬유미술학과 박사과정, 건국대학교 예술문화대학의 텍스타일디자인학과에서 디자인 석사 학위를 수여 받았다.
이를 바탕으로 국립중앙의료원에서 치과센터장과 건강검진센터장을 역임했고, NMC 미술관 관장, 국립중앙의료원 갤러리 스칸디아의 미술관장을 맡기도 했다.
# 우선 의술에 대한 점이 궁금하다. 의학의 길을 걷게 된 계기가 있다면?
특별하게 계기라고 말할 것은 없지만 어머니를 비롯해 집안 친지 중에 의사의 길을 걷는 분들이 많아, 자연스럽게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우선 어머니는 치과의사이며, 을지의과대학을 설립한 박영하 박사와는 사촌관계이다.
또한 매형의 아버지는 연세대 의무부총장과 아주대학교 총장을 지내신 김효규 박사이다. 국내 소아의학발전에 큰 공헌을 하셨으며, 연세대 의무부총장으로 재직하실 당시에는 영동 세브란스 설립에 큰 역할을 하신 것으로 알고 있다.
이외에도 작은이모와 사촌누나 등을 비롯해 여러 친척들이 의사의 길을 걷고 있으며, 이러한 부분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제가 의사의 길을 걷기로 마음먹게 된 것 같다.
# 성형외과와 치과, 그것도 치과 세부전공과목에서 턱얼굴외과와 치아교정 등 여러 분야를 공부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에 대한 설명을 부탁한다
최근에는 타 진료과목 간의 협진이나 교류 등이 어느 정도 활성화되어 있지만, 제가 학위를 취득할 당시만 하더라도 지금과 같은 협진의 개념은 좀 덜했다고 할 수 있다.
일례로 턱의 위치나 모양을 변형시키는 수술인 ‘양악수술’은 위턱인 상악(上顎)과 아래턱인 하악(下顎)을 함께 하는 ‘대수술’이며 구강악안면외과를 전공한 치과의사나 두개안면학을 공부한 성형외과 의사 간의 협진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얼굴 전체’를 봐야한다는 것이다. 양악수술을 해서 얼굴의 삼분의 일 가량이 바뀌었는데, 다른 성형외과 의사에게 코 수술, 눈 수술 등을 각각 따로 받는다면 얼굴의 전체적인 조화가 깨지고 어색해진다. ‘토탈 디자인’의 필요성이 중요한 까닭이다.
이를 위해 의과, 치과, 성형외과, 턱얼굴외과를 공부해 전문성을 높였고 미술대학의 학위를 통해 미적인 분야도 챙기려고 노력했다.
이뿐만이 아니라 앞서 언급했듯이, 양악수술의 초기 수술단계에서는 치아교정의사와 구강악안면외과 의사 간의 교류가 거의 없었다. 때문에 환자에게 문제가 생기면 서로에게 책임을 미루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지곤 했고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다양한 분야를 공부했다.
# 치과 진료를 하면서 환자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부분은 무엇인지
누구나 치과를 방문한 경험이 있는 분들은 대부분 통증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클 것으로 생각한다. 환자를 진료하는 의사로서도 임플란트, 발치, 치주염, 치은염 등 치과적 치료를 하면서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 환자의 통증 부분이다.
대부분 이 같은 치료는 마취 후 치료를 하기때문에 큰 통증은 없다고 할 수 있으나, 심리적으로 불안해하는 환자들은 작은 통증도 크게 느껴질 수가 있어, 보통 빠른 통증 완화를 위한 약물을 사용한다.
주로 국소마취와 소염, 진통효과가 있는 벤지다민성분의 약물을 사용하면 통증이 빠르게 사라지는 경험을 하는데, 특히 디프람 같은 고함량 벤지다민성분은 환자들의 순응도와 만족도가 높은 편이다.
# 국내 다양한 대학에서의 경험을 거쳐 공공의료 분야에서 오랜 시간 근무한 것으로 알고 있다
서울대학교를 비롯해 경희대학교, 연세대학교, 고려대학교, 대구가톨릭대학 등에서 외래 및 객원교수를 역임했고 앞서 설명한 외삼촌과의 연으로 대전을지의과대학(총장 박준영)에서 치과(턱얼굴외과) 과장으로 근무했다.
이후 공공보건의료 체계의 중추를 맡고 있는 국립의료원(현 국립중앙의료원)에서 치과대학 및 치의학 학위를 바탕으로 치과센터장을 맡았고, 그 후에는 건강검진센터장으로 근무한 바 있다. 또한 전체전문의협회장과 최초로 의사노조를 설립하기도 했다.
# 다음으로 예술가의 스토리를 묻고 싶다. 미술 중에서도 ‘텍스타일’이라는 생소한 분야를 선택한 이유가 있다면
치과의사의 길을 걷게 된 것이 어머니의 영향이었다면, 미술 쪽의 영향은 아버지로부터 많이 받았다. 한국자수박물관장을 하셨던 아버지는 우리나라 자수공예의 역사를 수집하고 연구하는 데 평생을 바치셨다.
1970년대 초부터 자수병풍과 보자기를 모았고 자수로 만든 복식과 장신구, 침선 도구 등 약 5000여점의 유물을 어머니가 운영하던 치과병원에서 전시하셨다. 지난 2018년 타계하시면서 소장했던 유물들은 모두 서울공예박물관에 기증했다.
텍스타일은 섬유의 조직과 표면에 다양한 무늬와 색상을 적용하는 디자인으로 ‘자수’를 수집하셨던 아버지의 영향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 것이라 생각한다.
# 의료계에서는 혁신적인 시도였던 국립의료원 내 미술관 개관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국립의료원(NMC)에서 재직할 당시, 병원이 주는 특유의 긴장감과 경계심을 없애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였고 국립의료원 50주년 행사 때 보건복지부에서 2억원의 예산을 받아 ‘국립의료원 NMC 미술관’ 개관에 성공했다.
그 당시 병원에 미술관을 개관하는 개념 자체가 매우 낯설었고 NMC 미술관이 의료계에서는 최초의 시도였다.
미술관 관장을 맡으면서 50주년 기념행사로 연예인 기획전을 준비했는데 환자와 대중들의 호응도 좋았고 반응도 매우 센세이션했다. 지금은 연예인과의 콜라보 행사가 많지만,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시도였기 때문이다.
이후 국립의료원(NMC)이 의료법인으로 전환하면서 ‘국립중앙의료원’으로 탈바꿈했고 건강검진센터장 자리를 맡으면서 기존 NMC 미술관이 ‘갤러리 스칸디아(Gallery SCANDIA)’로 바뀌었다. NMC 미술관과 갤러리 스칸디아까지 합쳐 거의 10년간 미술관장직을 역임했다.
# 현재 주력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앞서의 경험들을 바탕으로 수술과 강의, 세미나 등을 병행하고 있다. 특히 요즘은 엔도타인을 활용한 내시경술과 국내 의료기기업체인 국제메디언스가 취급하는 폭스(Fox) 레이저를 이용한 눈밑지방제거와 하안면부 거상술에 대한 임상강의를 진행 중이다.
# 앞으로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면?
여건이 허락한다면 문화적인 사업을 해보고 싶다. 한때 일상을 술과 골프만으로 보낸 적이 있었는데, 쉽게 무력해지고 지쳐가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하지만 미술과 음악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 활동을 시작하면서 삶에 여유가 생겼고 성격도 낙천적으로 바뀌었다. 전세계를 뒤흔들고 있는 코로나19를 비롯해 우리 국민들은 수많은 스트레스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저는 사회생활에서 영향을 받지 않는 정신적인 자유를 마음껏 즐긴다면 생활의 활력소가 생기고 인생을 살아갈 원동력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을 경험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앞으로도 다양한 문화사업을 통해 내 주변에 선하고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의사이자 예술가의 삶을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