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차의과대학 일산차병원 배종우(의학 72) 소아청소년과 교수


동문기고 [인터뷰]차의과대학 일산차병원 배종우(의학 72) 소아청소년과 교수

작성일 2021-10-25

[인터뷰]차의과대학 일산차병원 배종우 소아청소년과 교수

호흡곤란 신생아 치료 권위자 … 400g 영아까지 살려

  • 김일출 Systems Wisdom Korea 대표이사
  •  |   입력 : 2021-10-24 18:50:02


- 폐표면활성제 이용 치료법
- 日서 연수 뒤 국내 첫 도입
- 국내 신생아학 발전도 기여

- 미숙아 치료세트 5억 훌쩍
- 정부의 지속적 지원 필요
- 차세대 치료제 상품화 준비

- 진해 최초 서점 운영한 조부
- 소아과의사 父 애향심 빼닮아
- 지역 문화·역사 이야기 집필

‘패트릭 부비에 케네디’는 1963년 8월 7일 태어났다. 예정일보다 5주 빠른 출산이었다. 1850g의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호흡 곤란에 직면했다. 미국 매사추세츠 보스턴 어린이병원 인큐베이터 안에서 꼬박 이틀을 버티다 세상의 빛을 본 지 사흘 만인 9일 결국 사망했다. 미국 35대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아들이다. 최종 사망 원인은 유리질막증(Hyaline membrane disease·HMD). 지금은 표면활성제(surfactant)의 부족이 원인이라는 것이 밝혀져 신생아 호흡곤란증후군(Respiratory distress syndrome·RDS)이라 부른다. 그 시절 별다른 치료법이 없어 저체중 미숙아를 사망으로 내몬 치명적 질병이다. 우리나라에서도 한동안 이들 초저체중 미숙아에 대해서는 손을 놓았다. 1990년 대 초까지도 그들은 거의 다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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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종우 차의과대학 일산차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가 저체중 미숙아 치료법에 관해 설명한 뒤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정록 기자 ilro12@kookje.co.kr
현재 우리는 22주 이후 400g 이하의 초저체중 미숙(신생)아까지도 살린다. 여기까지 도달하는 데 꼬박 30여 년이 걸렸다. 23주 400g대는 생존율이 50%에 달한다. 1500g 미만 신생아는 30년 전 40% 생존했다. 지금은 90% 생존한다. WHO(세계보건기구) 기준 초저체중 미숙아는 1000g. 1000g은 과거 10%가 살았다. 지금은 70%가 산다. 출생아 수는 줄지만 임신 기간 37주 미만 출생 신생아인 미숙아는 오히려 늘고 있다. 2020년 통계청 출생통계에 따르면 미숙아는 8.5%에 이른다. 10년 전의 1.5배다. 이들 대부분 미숙아는 저체중 출생아다. 출생 체중 2.㎏ 미만을 저체중 출생아라고 하는데 지난해 저체중 출생아는 6.6%이다. 저체중 출생아 빈도 역시 증가 추세다. 이 같은 저체중 출생 미숙아가 증가하는 것은 산모의 사회활동 증가로 인한 조산과 쌍생아의 증가, 고령 산모, 고위험 산모의 증가 때문이다.

병을 안고 태어난 아이와 너무 일찍 너무 적은 무게로 생명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하는 아이는 신생아중환자실이라는 집중치료실에서 치료받는다. 생사를 넘나드는 진료의 현장이자 생명을 지키려는 숨 막히는 긴장으로 가득한 곳이다. 예상치 못한 비싼 치료비는 이들을 절망하게 했다. 어린 생명을 살려 오히려 적자에 허덕이는 병원은 하나둘 집중치료시설의 문을 닫았다. 이들 신생아를 살리기 위해 환자와 병원을 돕고 제도와 정책을 바로잡고 진료와 연구 개발에 한 평생을 헌신한 신생아의 대부가 있다. 배종우(67) 차의과대학 일산차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다. 지난 8월 31일 오후 경기 고양시에 있는 일산차병원 7층의 신생아센터에서 그를 만났다.

-폐표면활성제가 저체중 출생아 치료에 획기적인 전환을 가져왔다.

▶폐표면활성제를 이용한 치료법은 일본 이와테대학 후지와라 테쯔로(90) 교수에 의해 세계적 의학 학술지 ‘란셋’에 1980년 처음 발표됐다. 10명의 RDS 환자에게 소의 폐에서 추출한 물질을 투여한 결과 산소화를 개선하고 생존할 수 있음을 밝힌 것이다. 당시만 해도 치료법이 없었던 호흡곤란증후군 미숙아에게 폐표면활성제를 통한 치료에 세계 최초로 성공,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다. 폐표면활성제를 선도한 일본은 이 분야 치료 역시 세계 최고 수준이다. 1500g 신생아는 95%, 1000g은 80%, 300g 미만의 초미숙아도 어렵지 않게 살린다.

-미숙아 및 신생아의 치료를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했다.

▶신생아호흡곤란 증후군의 치료법인 폐표면활성제 보충요법을 1991년에 국내에 처음 도입해 보급·교육했다. 1992년 후지와라 교수 문하에서 연수한 뒤 귀국하면서 10개의 폐표면활성제를 국내에 들여와 최초로 치료에 적용했다. 미숙아의 사회적 인식제고 운동을 펼치고 저출생 고령화시대 극복을 위한 포럼 상임대표로도 활동했다. 저수가와 환자의 높은 진료비를 환자와 병원이 모두 감당할 수 있는 수준까지 만들었다. 지역별 신생아 중환자 관리체계를 구축하고 인원 기준도 최초로 마련했다. 극소저체중 출생아의 등록관리 프로그램인 한국신생아네트워크 데이터베이스를 구축, 2020년 현재 전국에서 100여 개 병원이 참여해 1만3960케이스를 등록했다. 이를 통해 미숙(신생)아 관리의 표준 지침 및 질 관리를 통한 질적 향상에 기여하고 있다. 1991년 이후 지금까지 독자적으로 국내 미숙아 및 신생아의 역학과 관련 전국 조사도 하고 있다. 이를 집대성해 2013년 ‘한국신생아역학:통계와 임상자료’를, 2018년 ‘한국모자보건통계집’을 출간했다. 고위험 신생아와 미숙아 관리를 위한 전국 신생아집중치료실 국가지원사업과 고위험산모 신생아 통합의료센터 신설사업을 주도했다. 2015년 미숙아 취약 지구를 선정해 장비와 인력을 지원하게 했다. 인큐베이터 300여 개가 확충됐고 비용을 정부가 지원하고 있다. 그 결과 출생 1000명 기준 1993년 6.6명이던 신생아 사망률이 1.6명으로, 영아 사망률은 1993년 9.9명에서 2018년 2.8명으로 현저히 줄었다. 극소저체중아 생존율은 1990년대 초반 66.5%에서 2018년 86%로 높아졌다.

-후지와라 테쯔로 교수를 만나 신생아학의 중심에 섰다.

▶1980년대가 한국신생아학의 태동기다. 1983년 소아과 전문의가 된 후 1986년부터 신생아학을 시작해서 초기 걸음마 시절의 한국에서의 신생아학을 체계적으로 자리 잡고 발전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전공의 때 논문으로 접했던 후지와라 교수를 만나 1990년 12월 한 달과 1991년부터 1992년까지 한 해를 연수하며 배웠다. 연수 기간 매주 한 번 점심을 후지와라 교수와 함께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일대일 특강의 자리였다. 나는 그의 말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식당의 냅킨에 빼곡히 써왔다. 나중에 귀국해 신생아 폐 질환 치료를 위한 책의 집필에 근간이 됐다. 그간 해외학회 구연 30회, 350여 편의 학술논문 발표, 10권의 서적을 출간했다. 대한신생아학회장과 대한소아과학회장을지냈다. 심사평가원 상임심사위원, 대한의학학술지의 출판윤리위원장으로서 한국의학 논문의 출판윤리를 확립했다.

-일산차병원 신생아센터에서 상당한 성과를 내고 있다.

▶24개의 인큐베이터를 운영하고 있다. 일산차병원 신생아센터에서는 매월 약 300명의 신생아가 출생한다. 전국에서 1, 2위를 다투는 규모다. 지난해 전국 출산 27만5000명 중 월 250명 연간 3000명의 신생아로 전국 추산 1% 이상을 담당하는 셈이다. 대한민국 신생아는 이제 연 30만 명이 안 된다. 그 중 1%는 나의 손을 거친다. 미숙아 한 명을 치료하는 데 쓰이는 인큐베이터 등의 치료 장비세트는 5억 원을 훌쩍 넘는다. 10세트면 50억 원 20세트면 100억 원 이상이 필요하다. 정부의 지속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개인적으로는 새롭게 시작한 일산차병원에서 차세대 폐표면활성제의 연구 개발에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동물의 추출물이 아닌 펩타이드 합성제를 통한 것으로 기존 치료제보다 더 안전하고 더 값싸게 공급될 것이다. 2017년 국내 특허를 얻었다. 차바이오종합연구소를 통해 국제특허와 상품화가 곧 이루어질 것이다.

-할아버지의 고향 진해 사랑을 빼닮았다.

▶할아버지 남파(南坡) 배익구(1909~2007)는 경남 창원군 웅남면 목리 출신이다. 지금은 LG전자가 들어서 있는 그 자리에 할아버지는 ‘과거 (창원군) 웅남면 목리 자리’라고 나무패를 만들어 세웠다. 1941년 분성 배 씨(盆城裵氏) 집성촌이자 고향인 웅남면 면장을 지냈다. 농사꾼으로 살다 해방을 맞아 인근 진해로 이사했다. 1946년 5월 진해시 근화동에 있는 일제 적산가옥에 최초의 서점 ‘한성당’을 열었다. 1971년 12월에 문을 닫았다. 진해시와 경상남도교육위원을 지냈다. 1963년 제1회 군항제부터 2001년 제39회 군항제까지 이충무공추모제 제전위원, 제관, 원임관 직을 수행했다. 1969년 창원향교 강사, 1983년 창원향교 전교(교장)를 지냈다. 1993년 8월 경남 창원시 신월동에 덕산서당을 세워 후학을 가르쳤다. 1991년 진해와 창원의 역사를 정리한 ‘창원 웅천 진해부(府) 현지(縣誌)’를 발간했다. 딸 넷 아들 둘을 명문대학에 진학시켰다. 큰아들인 아버지(배진기 1930~2005)는 할아버지의 서점 자리에 민중의원(1963~2005)을 열었다. 진해고를 졸업하고 서울의대를 거쳐 해군 군의관을 지낸 소아과 의사다. 서울상대를 졸업하고 울산대 총장을 지낸 배무기와 배재대 문과대학장을 지낸 배회임이 작은아버지다.


진해시 최초의 서점을 운영하신 조부님의 영향으로 나는 어린 시절 독서가 습관이 되었고 글쓰기로 이어졌다. 진해시의 문화 역사 이야기를 묶어서 45편의 글과 사진을 5년 전에 진해향토역사관에 기증했다. 조부님과 선친에 대한 추모 사진집을 발간하고 조부의 일생을 정리해 진해문화원에서 내는 ‘진해문화’에 게재했다. 진해에 부모님과 조부모님 산소가 있어 지금도 제사나 명절 때 찾는다. 진해 도천초등학교 66년 졸업 동기들 모임 밴드에 방장을 맡고 있다.


◇배종우 교수는

▷1954년 경남 진해 출생 ▷학력 : 진해 도천초등, 서울 경동중, 경동고, 경희대 의학과 졸업, 경희대 의학석사 및 의학박사, 경희대학교병원 인턴 및 레지던트, 일본 이와테의대 소아과 신생아학 연수 및 초청강사, 미국 Loma Linda 의대 병원 신생아학 연수 ▷경력 : 경희대 의대 부속병원 소아과 임상강사, 동 대학 조교수·부교수·교수, 강동경희대학교병원 신생아중환자실장 겸 모자보건센터장, 경희의학전문대학원 및 의대 소아청소년과 주임교수 ▷학회 : 대한신생아학회장, 대한소아과학회장 역임, Pediatric International 잡지 논문 심사위원 ▷기타 : 대한민국 의학한림원 정회원, 대한민국 저출산대책 의료포럼 상임대표 ▷저서 : ‘표와 그림으로 보는 신생아학’(공저, 한국의학사 2004), ‘한국 신생아 역학:통계와 임상자료’(신흥메디사이언스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