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호원칼럼- 기다림의미학


동문기고 안호원칼럼- 기다림의미학

작성일 2013-08-24
자연은 아무리 해도 속일 수 없나보다. ‘초복’, ‘중복’, ‘말복’이 지나고 이제 ‘처서’에 들어서면서 기승을 부리던 여름 더위가 서서히 꼬리를 내리는 것 같다. 아침. 저녁은 시원할 정도다.
 
“편히 쉴 수 있는, 그리고 가족이 기다리는 집이 있나요? 하루의 일을 마치고 돌아가면 몸과 마음을 내려놓고 편히 쉴 수 있는 집이 있나요? 고단하지만 누군가는 먼저 와서 기다리는, 누군가를 위해 꽃이라도 한 다발 사서 들어가고 싶은, 그런 포근한 집이 있나요? 늦게 귀가하는 가족들을 위해 꽃향기보다 더 그윽한 향기를 내 품으며 몇 번이고 된장찌개를 끓이는 아내가 있는 그런 집이 있나요?”
 
때가 되면 그냥 등불에 몰려드는 벌레처럼 모여든다고 다 집은 아니라 생각된다. 사무실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문득 오래 전 온 가족이 호롱불 밑 둥근 밥상에 둘러앉아 저녁을 먹었던 때가 어렴프시 떠오른다. 그런데 결혼 이후 온 가족이 둘러앉아 식사를 한 적이 있는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그런 저녁은 없었던 것 같다. 가족이 있어도 늘 밥상에는 혼자였다.
 
지난 대선 때 누군가 기억은 나지 않지만 한 예비후보가 ‘저녁이 있는 삶’을 구호로 내걸었던 적이 있다. 좀 심하게 말해 저녁이 없어졌다는 것은 가족의 일상이 사라진 것이고 가족의 일상이 사라졌다는 것은 곧 가족의 공동체가 무너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지만 칙칙한 등불아래 둥근 밥상에 둘러 앉아 온 가족이 저녁을 먹던 그 시절이 못내 그립다.
 
지나간 모든 것은 그리움이라 하지 않았는가. ‘가족’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불리던 장기려 박사는 6.25전쟁 당시 피란 통에 가족들과 생이별을 경험했던 분이다. 1.4후퇴 때 자신이 돌보던 환자들을 정신없이 트럭에 태우고 내려오다 보니 정작 아내와 4남매 자식들을 남겨두고 내려온 것을 알았다. 그 후 그는 남한에서 40년 이상을 혼자 살면서 오직 아내와 자식들만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늘 혼자만의 쓸쓸한 밥상이었다. 주위에서 행여 라도 재혼을 권유 할라 치면 그는 늘 “나는 아내에 대한 사랑이 너무 크기 때문에 재혼할 수가 없습니다. 그를 다시 만날 터인데 어떻게 재혼을 한단 말입니까? 북에 있는 아내 역시 오늘 이 시간까지 참 사랑을 간직한 채 나를 기다리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만약 살아생전 다시 만날 수 없어도 우리 사랑은 저 천국에서 영원할 것입니다. 그래서 난 재혼할 수가 없습니다.”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 아내를 기다리는 남편의 마음의 마음이 너무 애절하다. 남과 북의 갈라짐으로 기약조차 없는 아내를 기다리는 그의 순백한 사랑을 보며 마음에 떠오르는 명제가 있으니 ‘사랑은 끝없는 기다림’ 이라는 것이다. 사랑의 진정성은 반드시 ‘기다림’으로 표현된다. 왜일까? 그런 기다림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았다.
 
‘기다림’ 이란 일단 상대방의 시간에 나를 맞추는 것이라 정의하고 싶다. 이는 자기의 시간과 주도권을 포기 하지 않고 고집하는 자에게는 ‘기다림’ 이란 아무 의미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시간이 기준이 되어 나를 거기에 맞추어야만 기다림이 가능하리라 생각된다. 내가 누군가를 기다리는 시간만큼은 내가 중심이 아니라 그가 중심이 되는 것이다. 내 시간이 중심이 되는 게 아니라 그의 시간이 중심이 된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기다림이라 말 할 수 있다.
 
그가 중심이 되지 않고는 그 기다림의 시간은 짜증과 분노가 쌓이고 폭발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자아가 죽어지고 중심이동이 된 상태에서 ‘기다림’의 시간은 짜증과 분노의 시간이 아닌 사랑과 순종을 만들어내는 시간이 되는 것이다. 기다림의 본질을 굳이 따지자면 신앙의 본질이라 할 수도 있다. 신앙과 기다림의 본질은 다 똑같다. 결국 기다림은 사랑의 본질이고 신앙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누군가에게 주어진 기다림의 시간은 결코 애매하게 낭비되는 시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언제나 무엇인가를 기다리며 산다. 그 기다림은 때에 따라서는 슬프기도 하고, 기쁠 수도 있다. 취업을 기다리기도 하고 결혼을 기다리고, 병상에서 회복을 기다리고 기다림도 따지고 보면 가지가지다. 그런 기다림 속에서 어떤 때는 스스로 낙오자임을 인정하고 실망하기도 한다. 그들에게 지금 한 마디 해주고 싶은 게 있다. ‘가보지도 않고 미리부터 포기하지 말라’고 누군가가 당신을 어디선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아무도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기다림의 본질을 모르기 있기 때문이다. 후보 선수, 제 2진이라 출전을 하지 못하더라도 전ㆍ후반전이 있고, 또 예선, 본선이 있음을 알고 끈기 있게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결코 실의에 빠져 시간을 낭비 한다고 생각하지는 말라는 것이다.
 
나의 중심이 아닌 상대가 중심이 되는 기다림은 그리움이자 사랑이다. 누군가를 기다리며, 누군가를 사랑하며, 누군가를 그리워 한다는 거 생각만 해도 풋풋한 가슴이 설레 이지 않는가. 어둠이 짙어 가는 저녁 퇴근 시간, 나를 기다리고 있을 가족들, 또 내가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가족, 벗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알아야 한다.
 
장기려 박사를 생각하며 언제라도 만날 수 있는 그리운 가족이 내게 있음에, 나를 기다려주는 그런 가족이 있음에 감사하며 행복해 할 줄 아는 우리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기다림과 그리움의 사랑이 있는 지금 바로 이 시간, 가장 행복한 순간을 보내고 있음에 감사하자. 행복은 스스로가 찾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