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기고
안호원칼럼-인간은 생각하는 갈대
요즘 정치권을 지켜보면서 600여년 전 고려말 조선왕국을 이룩한 이성계에 이어 세 번째 왕으로 등극한 이방원과 고려의 마지막 충신인 정몽주가 만나 술잔을 나누며 읊었던 시조가 떠오른다. 먼저 이방원이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하며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는 세력에 동참할 것을 은근히 떠보자 정몽주가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하며 고려왕조에 변함없는 충성을 다할 것이라며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 결과로 정몽주는 개성 선죽교에서 철퇴를 맞고 살해를 당한다. 역사적 사실에서 볼 때 옳고 그름을 해석하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으나 지금의 상황에서는 누구에게든 선악을 가릴 수 없을 것 같다. 두 사람의 시조 내용을 보면 요즘 말로 치면 ‘변화’를 요구하는 ‘진보’와 ‘기존’을 고수하려는 ‘보수’의 대립이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변화와 기득권 고수는 묘한 관계다. 변화를 추구하다 보면 마치 기존의 것은 다 버리는 것 같고 기존의 기득권을 고집하다 보면 변화되는 흐름을 놓쳐 판단을 그르치기도 할 수 있다.
둘은 극과 극처럼 상반되어 보이지만 자석과 같이 함께 할 수밖에 없다. 서로 대립되어서도 안되고 또 어느 한 쪽으로 치우쳐서도 안된다.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하고 흘러간다. 작은 변화들이 소리없이 흘러가며 어느 한순간 놀라우리만치 큰 변화가 도래되는 것이다. 요즘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참 빠르게도 많은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600여년 전 이들이 나누었던 시조들에 대한 당시의 틀에서 벗어나 현시점에서 바라보면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는 것 같다.
세상이 이기적으로 변화되다 보니 미련스럽게 기득권을 고집하는 정몽주 보다 얼렁뚱땅 내 이익을 추구하려는 이방원을 더 좋아하는 세상이 되어 버린 것 같다. 4.24 재보선 선거판을 보면서 더욱 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정치 지도자는 운전기사와 같다. 운전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승객이 편안할 수도 있고 다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운전기사가 잘못함으로써 애꿎은 승객이 귀중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부로 운전대를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경쟁자를 헐뜯고 모함까지도 한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자질이 부족함에도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승객들을 혼란스럽게 만든다는 것이다. 엄청난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죄를 헬라어로 ‘하말티아’라고 표현한다. 그 뜻은 ‘과녁에서 빗나가다’라는 뜻이다. 죄는 삶의 과녁에서 벗어난 상태, 화음이 깨진 상태를 말하기도 한다. 원래 창조 목적에서 빗나가면 죄의 길로 접어든다.
프랑스의 철학자 파스칼은 명상록 ‘팡세’에서 인간을 두 가지로 비유했다. 그는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로 표현했다. 인간은 지극히 나약한 존재지만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이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결코 약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파스칼은 또 한편으로는 인간을 ‘아름다운 오르간’으로 묘사했다. 이유는 바람의 힘과 연주자의 기술이 합쳐져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기 때문이라고 했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섰어도 달라진 게 없다. 오히려 화가 나고 속상할 때가 더 많다. 정치 지도자나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의 ‘신념’이 아니라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식으로 자신들이 편한 쪽으로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마치 기존의 것은 모두 다 나쁜 것처럼 호도하며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려고 한다. 그래도 빈자이며 약자이기도 한 민중은 분노가 치솟아도 참을 수밖에 없다.
화나고 속상할 때도 욱하고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눌러야 한다. 그리고 정치꾼들이 상당히 웃기는구나 생각하며 문제를 단순화 시켜야 할 것 같다. 아울러 내가 왜 당신들 때문에 속을 썩어야 하지? 그렇게 편하게 생각하자. 또 속상한 자극에 연연하지 말고 세상만사 새옹지마라고 생각하며 심적 자극에서 탈출하려는 의도적인 노력을 하자. 아무래도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달래고 변화되어야 그나마 숨통이 트일 것 같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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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 더 하자면 “사람은 낮은 곳으로 가야한다. 가장 낮은 것이 가장 숭고한 것이고, 가장 공허한 것이 가장 실재적인 것이다. 또 가장 생태적인 것이 가장 현대화된 것이다” 중국 고전의 대가 이중텐(易中天)이 풀이한 노자(老子)의 핵심이다. 4.24 재보선의 결과가 두렵다. 자칫 선택을 잘못하고 그릇된 판단으로 자질이 부족한 자가 운전대를 잡게 될까 염려스러운 것이다. 정치 지도자가 되려면 국가관이 확실하고 신념이 강하고 신뢰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일부 선거구에는 자질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대선후보까지 나왔던 사람이 국회의원 배지를 달겠다고 난리를 피우고 있다. 정치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제발이지 지금이라도 자신을 제대로 알고 바른 처신을 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더 이상 군중심리를 이용, 유권자들을 혼란에 빠트리지는 말아주었으면 한다. 지식만 갖고 정치인이 될 수 없다. 아무리 세대가 변화되어 이방원의 시조가 어울리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정몽주의 신념의 시조가 맞을 때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자.
물론 앞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어느 것이 옳고 그르다고 가리기는 어렵다. 특히 변화의 시기에는 그 기준조차 변할 수 있기 때문에 판단이 어렵다. 어떤 판단을 하고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세상이 바뀔 수도 있다. 파스칼의 말처럼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 좋은 세상을 바라며 생각하는 우리가 되자.
[시인.칼럼니스트.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