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호원칼럼- 만나면 좋은 사람들


동문기고 안호원칼럼- 만나면 좋은 사람들

작성일 2013-03-07
며칠 전 모 신학대학원 총동문회가 주관하는 행사장에서 모든 동문들이 안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목사들에게는 찾아가 인사를 하면서도 자신이 싫어하는 목사는 외면하고 자리를 피하는 것을 보면서 세 부류의 인간성을 떠올려보았다.
.
흔한 말로 0. 있어서는 안 될 사람, 0. 있으나 마나 한 사람, 0. 꼭 있어야 할 사람이다.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끈끈한 정, 의리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
싫은 사람일지라도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만남은 이루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제는 자신이 어느 부류에 속한 사람으로서 만남이 이루어지느냐 하는 것이다. 없어져야 할 사람, 있으나 마나 한 사람이 본분을 망각하고 오히려 꼭 있어야 할 사람을 외면하거나 피한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
더 큰 문제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자신의 뜻과 맞지 않는다고 해서 헐뜯고 모함을 한다는 사실이다.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
이웃을 사랑하고 용서하며 가장 낮은 자로 살아야 한다며 강단에서 말씀을 전하는 목사들이 눈에 보이는 자신의 유익만을 저울질하며 꼭 있어야 할 사람이 되지 못하는 불편한 관계를 보면서 성도들은 속일 수 있어도 그들이 믿고 따르는 하나님은 속일 수 없음을 알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충고를 던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너무나도 이중적인 모습에서 역겨움까지 느낄 정도였다.

성경에 나오는 ‘데마’라는 사람이 바로 그런 부류의 사람이다. 그는 자신에게 상당한 유익을 가져다 줄 것으로 믿었던 바울을 만나서 열심히 따라 다녔다. 그러나 늘상 바울은 어려움을 겪으며 먹는 것조차 변변치 못하자 자신에게 유익함이 없다는 판단아래 바울을 버리고 떠나 버렸다. 이런 이해타산에 얽힌 인간관계는 좋은 만남이 될 수 없을뿐더러 행복도 나눌 수 없다.
.
겉으로 보이는 성직자의 모습이 이렇다면 과연 속세의 범인(凡人))들과 다를 게 무엇이겠는가. 어찌 자신들의 유익만을 따져 사람들을 만나야 하는가. 기왕지사 세상에 태어났다면 우리는 꼭 필요하고 만나고픈 사람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안 보이면 그립고 기다려지는 그런 사람 말이다. 그리고 만나면 편하고 좋은 사람으로서 만날 때마다 반가운 얼굴이 되어야 한다. 그러한 만남으로서의 삶을 산다면 우리는 굳이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디모데처럼 눈물이 많은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만나고 싶은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은 마치 동전과 같이 양면성은 언제나 존재하고 있다. 만나면 마음이 불편해지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이다. 한 예로 성경에 나오는 구리세공업자인 ‘알렉산더’를 들 수 있는데 ‘알렉산더’는 ‘바울’에게 많은 손해도 입혔지만 바울을 험담하고 다니며 심지어는 그의 설교까지도 트집을 잡으며 바울을 무척 힘들게 한 아주 불편한 사람이다. 반면에 의사인 ‘누가’의 경우 바울의 주치의로 바울을 섬기고 돌보면서 바울을 항상 편하게 해주며 만나면 좋은 사람, 편한 사람이었다.
.
공원이나 유원지에 가보면 간혹 어린아이가 혼자 울면서 다니는 것을 본적이 있다. 우는 그 아이들은 대부분 엄마를 잃어버리고 두려움에 떨며 엄마를 찾아 서럽게 우는 것이다. 그 울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서 ‘만남’의 의미를 잠시 생각해보았다.
.
아마도 아이들은 엄마가 곁에 있는 것을 보고 정신없이 어떤 일에 몰두하거나 아니면 주위 또래들에게 어울려 노는 재미에 어미라는 존재를 잊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어느 한 순간 엄마가 곁에 없음을 깨닫게 되자마자 불안해진 아이는 지금까지 즐겁고 재미있었던 일들을 모두 팽개치고 두려움과 놀라움으로 울음을 터트리며 잃어버린 엄마를 찾으려고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게 일단 엄마가 나타나 아이의 손을 잡게 되면 좀 전까지 울던 아이가 울음을 그치고 또 다른 곳으로 시선이 바뀌면서 흥미롭고 재미있는 일에 빠져버린다는 사실이다. 좀 전에 느꼈던 두려움을 잊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이 어쩜 우리의 삶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 내가 어떤 처지와 상황에 있다는 것을 의식하는 순간부터 자신을 연약한 인간, 두려움이 가득한 인간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 같다.
.
우리의 삶도 이런 어린아이들과도 같은 마음일수도 있다. 세상 재미에 빠져 있을 때는 모두를 잊고 살다가도 아쉬울 때는 찾고 또 언제 그랬느냐하듯 잊어버리고 세상 환락에 빠져 살아온 우리의 삶이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태초에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어울려 사는 존재, 공동체 생활을 하도록 창조하신 거다. 함께 울고 또 함께 울도록 만드셨다. 그래서 한문으로 사람 인(人) 자를 두 사람이 서로 기대여 있는 모습으로 만들었다. 서로 기대고 의지 할 때 비로소 인간다운 인간이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도 친정 엄마마음처럼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푸근함을 주는 편하고 좋은 사람, 어린아이가 찾는 그런 엄마의 존재로 만나면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런 만남이야말로 바로 행복의 만남, 축복의 아름다운 만남인 것이다. 만날 수 없어도 그립고 보고픈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성경에도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 하라”는 말씀이 기록되어졌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은 ‘희망’이고 우리에게 준 가장 큰 자유는 ‘상상’이다. 아울러 가장 큰 축복은 너와 나 그리고 우리의 ‘만남’이다.
.
어느 여가수가 부른 ‘만남’이라는 노래가사처럼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바램이었고 축복인 것이다. 세 부류의 사람들을 앞서 언급한 바 있지만 종교적 차원에서 볼 때도 목사들도 세 부류가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목사, 또 하나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목사. 마지막으로는 하나님을 찾으면서도 못 만나는 목사다. 이런 목사는 바로 비참한 목사들이다. 말로만, 입으로만 형제자매를 찾고 부르지 말고 말을 아끼되 칭찬하는 말만 하고 성도의 허물을 덮어주며 아픔까지도 함께 나누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런 목사는 하나님을 만난 목사가 될 수 있고 행복한 목사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을 만나는 관계에서 성도들에게 귀범이 되며 아주 좋은 목사, 편안한 목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런 관계가 바로 믿음의 만남이고 만나면 즐거운 사람이 될 수 있다. 목사가 아니라도 있어서 좋을 것은 칭찬과 사랑의 따뜻한 한 말 한마디, 버려도 좋은 것은 미움과 질투, 시기와 모함이다. 이 사회에서나 교회에서 유익하고 소중한 사람, 꼭 있어야 할 사람으로 기억되지는 그리고 예수를 아는 종교인이 아니라 예수를 믿고 따르며 순종하는 목회자로 거듭 나기를 빌어본다. 언젠가는 이별을 해야 하는 우리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써 외면하고 만나지 않는 불행하고 비참한 삶을 살지는 말자. ‘산 위에 오를 때 보지 못한 꽃 내려오면서 보았네’라는 시 귀처럼 자신을 되돌아보면 어떤 부류의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이런 만남의 축복과 행복은 돈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편안한 인간관계에서 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