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기고
안호원칼럼- 아름다운 동행
김은국 작가가 쓴 ‘순교자’라는 장편소설을 보면 한국전쟁 때 공산당에 의해 북으로 납치된 열네명의 목사 이야기가 나온다. 공산당은 열네명의 목사들을 산으로 끌고 가 살해했는데 그 중 열두명의 목사는 목숨을 잃고 두 사람은 살아서 마을로 돌아왔다. 그들이 마을로 들어서자 마을은 발칵 뒤집혔다.
마을 사람들의 생각은 ‘열두명의 목사는 순교를 한 것이고, 살아 돌아온 두 목사는 신앙을 부인해서 목숨을 건진 것’이라고.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두 목사를 매우 안좋게 보았고 심지어는 아주 심한 말로 그들을 괴롭히고 힘들게 했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고 묵묵히 견디어냈다. 세월이 흐른 후 목사들을 살해한 공산당 간부가 붙잡혔다. 그 때 비로소 사실이 밝혀졌다.
공산당 간부는 사건의 전말에 대해서 자백을 했다. “열두명의 목사들이 살해된 이유는 그들에게 확실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고 살아남은 목사 두명 중 한명은 갖은 고문에 정신이 희박해져 죽일 필요가 없었고 다른 또 한명인 목사는 굳건하게 믿음을 지키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던지 우리가 오히려 감명을 받아서 살려주게 된 것이오.”
이 책은 열두명의 목사가 살해되었지만 사실 그들은 순교자가 아니었고 굳이 순교자를 말한다면 오히려 살아남은 한명의 목사라고 말한다. 마을 사람들은 “왜 목사님은 그런 사실을 그대로 밝히시지도 않고 온갖 조롱과 수모를 견뎌냈는가”라고 묻는다.
만약 그 목사가 마을 사람들에게 사실 그대로의 상황을 설명하고 이해를 시켰다면 이미 목숨을 잃은 열두명의 목사들은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았을 게 분명하다. 그래서 그 목사는 온갖 조롱과 수모를 당하며 괴롭고 힘들어도 먼저 간 그 목사들을 배려하는 마음에서 차라리 아무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견디는 편을 택한 것이다. 진정한 순교자는 어쩜 바로 살아 돌아와 침묵으로 일관한 그 목사일 수도 있다.
꼭 말을 해야 말이 아니다. 때로는 침묵이 더 큰 메시지를 줄 수 있음을 알게 됐다. 과연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와 같은 배려의 마음이 남아 있을까? 흔히 배려는 “나를 넘어서는 도약대 그래서 세상과 조화를 이루는 연결고리”라고 할 수 있다. 또는 “사람간의 관계를 이어주는 고리”라고도 한다.
‘배려와 침묵’ 문득 전직 기자출신인 목사님이 떠오른다. 그 목사님은 20여년간의 기자생활을 거쳐 지난 2002년부터 사례비도 받지 않고 10여년 넘게 협동목사로 지내온 분이다. 그런 목사님이 지난 4월말 시무하던 그 교회를 나와 가정예배로 개척을 했다. 그런데 떠나온 교회에서 목사님의 입장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여러 말이 난무하며 오해를 낳고 있다.
한 장로는 “평신도도 아니고 목사라는 분이 하루아침에 불쑥 떠나시는 건 우리 성도들을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배울만큼 배우신 분이 그렇게까지 할 수는 없는 게지요.”라며 “그런 분위기로 되다 보니 송별금은 고사하고 송별 예배조차도 생각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 그 목사님이 왜 그렇게 했어야 했는지는 알지도 못하면서 그 목사님을 나쁜 목사로 내몰아 버린 것이다.
자신들과 미리 상의조차 없었다는데 대해 불쾌해 하는 것 같았다. 그 목사님은 그런 교회의 흐름을 알면서도 굳이 변명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마음에 있는 이유를 사실대로 말하면 담임목사가 성도들에게 나쁘게 비춰질까 염려되기 때문이다. 또 목사들만의 문제를 성도들에게까지 알려 신앙심을 흔들어 놓을 수는 없기에 조용히 떠났을 뿐이라고 고충을 털어 놓았다.
10여년 넘게 주일(일요일) 마다 무려 여덟살이나 아래인 담임목사를 보고 먼저 인사를 하지만 단 한번도 인사를 제대로 받아준 적이 없고 시선도 마주치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대화도 별로 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교단행사도 알려주지 않는다. 예배순서에 대해 협조를 구해도 대답이 없다. 때로는 교단행사 때 방향이 같아 ‘동승’을 부탁해도 ‘차’를 운행하지 않는 말로 거절을 했는데 막상 행사장에서 보면 ‘차’를 갖고 왔고 거기다 다른 목사들을 동승시키는 것도 보았다고 한다.
물론 담임목사는 그 목사님이 목격을 한 것을 모른다. 그럴 때마다 허탈해지는 마음을 걷잡을 수가 없었다고 괴로웠던 심경을 털어놓는다. 한마디로 담임목사는 그 나이 많은 협동목사가 교회에 있는 것이 불편했던 것이다. 더 괴로운 것은 담임목사 사모다. 말을 함부로 하거나 지나친 관심(간섭)으로 협동목사 부부가 다투는 일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도 나이 많은 사람이 참아야 한다며 ‘사모’를 달래기도 여러번 했다고 했다.
2년 전부터 교회를 떠나게 될 것을 몇 회에 걸쳐 예고했지만 늘상 무반응을 보였고 오히려 교회를 떠나게 된 협동목사를 매도하며 교회를 떠나는 것은 잘못이라는 말로 일축해버리면서 성도들조차 그 목사님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갖게 했다. 협동목사가 떠난 이후 한 통의 전화도 없는 담임목사. 그 목사님은 “성도들이 언젠가는 자신의 행동을 이해해줄 날이 있을 것”이라며 모든 것을 자신의 부덕함으로 돌리며 씁쓸하게 웃는다.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은 정작 관심을 가져야 할 때는 외면하면서도 관심을 갖지 않아도 좋을 때는 지나친 관심(간섭)으로 상대를 피곤하게 하고 힘들게 한다. 이처럼 남에게 지나친 관심을 가지면서 함부로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맹자는 이에 대해 “이기언야 무책이의(異其言也 無責耳矣)”라고 했다. 즉 사람들이 함부로 말하는 것은 말에 대한 책임추궁을 받지 않고 일일이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협동목사님에게 감명을 받은 것이 또 하나 있다. 그 목사님은 자신도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노동을 해서 번 돈으로 몇 해전부터 10여개 개척교회에 분기별로 베풂의 삶을 살고 있다. 늘 “베풀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이 내게 주신 축복”이라며 “진정한 나눔은 내가 갖고 있는 것을 나누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목회자다.
이번 추석에도 예외없이 ‘사랑의 나눔’을 묵묵히 실천하셨는데 이 과정에서 일어난 일을 말했다. 개척교회 목사 한 분에게 여름양복도 해주고, 안경도 새로 맞춰주고, 때때로 쌀과 생필품도 전달하며 형제처럼 지냈는데 그 개척교회 목사가 자꾸 다른 목사들에게 이간질을 하면서 그 목사님을 불편하게 했다고 한다. 이 때도 목사님은 화가 났지만 그 젊은 개척교회 목사를 생각해 사실을 밝히려고 하지 않았단다.
다만 그 개척교회 목사가 좋은 사람은 아니구나 하는 마음에서 올 추석 ‘사랑의 나눔’에서 빼버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마음이 무척 불편하고 아팠다고 한다. 결국 그 개척교회 목사에게 뒤늦게 쌀과 송편과 생필품을 전해주었더니 “형님이 바로 예수님 닮은 분이십니다. 없는 말을 하고 돌아다닌 놈 용서하세요. 형님이 너무 훌륭하다보니 내 눈이 뒤집혔나 봅니다.”
눈믈을 글썽이는 그 개척교회 목사 등을 두드리며 “모든 것을 다 이루게 해주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을 믿고 기도하며 기다리자”는 말을 해주었다고 한다. 그의 잘못을 지적하지도 않고 오직 침묵과 나눔으로 그를 용서한 것이다. 개척교회를 시작한 그 협동목사님은 지금 ‘무선 마이크’를 필요로 하고 있지만 그 보다 먼저 ‘이웃’을 생각하고 함께 하며 나누는 삶을 실천하는 목회자다.
일부 여유있는 목사들이 ‘자신과 명예’를 위해서는 거금도 아끼지 않고 선뜻 쓰면서도 어려운 동료 목회자들에게는 인색한 것과는 사뭇 대조적인 삶을 살고 있는 목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