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호원칼럼- 이 가을, 사랑의 기도를 하게 하소서


동문기고 안호원칼럼- 이 가을, 사랑의 기도를 하게 하소서

작성일 2012-09-27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하게 쓰는 말 중에 ‘떡’이라는 말을 쓰는데 이 말이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 받아들여지는 의미가 천차만별로 해석된다. 떡이란 원래 곡식가루를 찌거나 빚어 만든 동양권의 고유음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며칠간 머리를 안감았더니 떡이 됐네”라고 말할 때 떡은 머리가 뒤엉켜져 잘 빗어지지 않는 머리카락을 가리키는 말이다.

또 “떡 주무르듯 하는구나”할 땐 자기 마음대로 횡포를 부릴 때 쓰여지는 말이다. 특히 “떡을 친다”는 넘칠 정도로 양이 충분하다는 뜻도 있지만 남녀의 교합(交合)을 속되게 표현할 때도 쓰여지는 말이다. “떡이 되도록 술을 퍼 마셨다”고 하면 인사불성의 만취상태를 뜻한다.

이처럼 상황에 따라 똑같은 떡이라는 말이지만 의미가 다양한 만큼 예부터 떡에 얽힌 속담이 많다. “떡 본 김에 제시 지낸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하는데 김치국부터 마신다” “밥 먹는 배 따로 있고, 떡 먹는 배 따로 있다”는 속담들도 있다. 이밖에도 “떡 주고 뺨 맞는다”느니 “떡을 달라 했는데 돌(石)을 준다”는 세상인심의 야박함을 빗댄 속담도 있다.

또 “떡이나 해먹을 세상”이라느니 “떡 해먹을 집안”이라는 악담의 말도 있다. 이 말의 뜻은 궂은 일만 계속 일어나는 세상이나 일이 제대로 안되고 순탄치 못한 집안을 지칭할 경우에는 자조적인 말로 들리기도 한다. 떡을 해놓고 고사라도 지내야할 정도로 상황이 나쁘고 풀리는 게 없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떡이란 절기에 맞춰 해먹는 절식(節食)이자 별식이다. 특히 동양권인 우리나라의 경우 설날은 가래떡, 대보름은 약식, 칠석은 백설기, 추석은 송편, 상달 시루떡 등 우리 조상들은 명절과 절기에 맞춰 갖가지 종류의 떡을 만들어 먹었다. 뿐만 아니라 인심도 좋아 생일이거나 고사를 지내거나 이사를 했거나 아이를 낳았을 때도 떡을 만들어 이웃들과 나눠 먹으며 아름다운 미덕을 보이는 민족이었다.

어느 때부터인가 설이나 추석, 연말이 되면 직장에서 직원들에게 보너스를 줄 때 ‘떡값’이라는 말을 즐겨쓰게 됐다. 또 떡값이라는 말에 특별히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없다. 그저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잠재적인 습관속에서 무슨 때가 되면 아무리 형편이 어렵더라도 당연히 떡은 해먹어야 한다는 인식이 담겨져 있을 뿐이다.

이 같은 의미의 떡값이 세태를 반영하듯 명절 이외도 각종 이권이나 입찰 등 필요에 따라 사례비 명목으로 전해지면서 순수했던 ‘떡값’의 의미를 퇴색시키고 있지만 떡값의 의미는 ‘나눔의 미덕’을 상징하는 말이라 하겠다.

‘더도 덜도 말고 팔월 한가위만 같아라’ 하는 팔월 추석. 해마다 맞이하는 추석 명절이지만 늘 이맘 때만 되면 풍성하지만 허전한 가을을 경건함으로 채워주는 가을의 기도가 떠오르곤 한다. 누가 뭐라해도 가을은 추석의 계절이다. 팔월 추석은 우리에게 고향이고 조상이며 역사이자 자연이다.

이처럼 추석이 우리에게 소중한 이유는 메마른 일상에서 벗어나 조상의 흰 뼈가 시퍼런 역사로 누워있는 자연으로 돌아가 우리의 초라해진 삶을 정갈하게 씻어낼 수 있기 때문이라 하겠다. 이번 추석에도 지난해처럼 많은 사람들이 산(山)을 넘고 물(水)을 건너 그리운 가족, 이웃들이 있는 고향을 찾아 떠날 것이다.

추석 밥상머리에선 당연히 12월 대선을 화제로 이야기꽃을 피우겠지만 조상의 무덤 앞에 엎드리면 누구라도 경건함의 고독에 빠져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될 것이다. 마른 나뭇가지 사이로 이름 모를 새들이 날고, 치열한 고독의 무덤 앞에서 삶과 죽음의 의미를 성찰하게 될 것이다.

바닷가 파도처럼 굽이치던 고뇌의 세월들, 사슴의 눈처럼 해맑았던 명상의 언저리를 서성이며 아직도 탐욕의 굴레를 벗지 못한 자신의 초라한 모습에 마음 아파하며 회한의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다. 거친 삶 속에서 모질고 각박했던 언행들, 끝내 내려놓지 못한 자기애(自己愛), 그 덧없는 욕망들.

추석이 아니더라도 낙엽이 지는 때가 되면 누구나 마음속 깊이 묻힌 ‘추억’을 끄집어 내기 마련이다. 오래도록 잊었던 태(胎)의 소리, 거짓이 끼어들 틈이 없는 절절한 고백을 하는 자기만의 시간을 갖게 된다.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김현승 시인의 ‘가을의 기도’ 중에 나오는 싯귀다.

계절의 모퉁이를 휘돌아 나온 가을바람만큼 영혼의 더듬이를 곤두세우는 유혹이 또 있을까. 풍요로운 영혼이 아니라 가난하고 찌든 삶의 영혼의, 그 고독한 넋, 고독해지기에 절대자를 찾고 가난하기에 진실한 위로를 목마르게 갈구한다. 김현승 시인의 시를 보면서 만인을 사랑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지극히 작은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요, 지극히 작은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 오직 한 사람을 택하는 까닭은 다른 이를 배척하라는 뜻이 아니고 그 한 사람 안에서 모든 사람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온 대중을 구원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한 개인을 바라볼 따름이다. 나는 한 번에 오직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을 뿐이다” 모든 빈자들을 위해 헌신한 테레사 수녀의 말이다.

사랑의 고백이 절실하려면 그 대상이 구체적이지 않으면 안된다. 그 작은 한 사람으로 인해 우리는 비로소 모든 생명과 연관된 상생(相生)의 자리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진정한 부자, 풍요로운 자는 천문학적인 숫자의 돈을 통장에 넣어 둔 이가 아니라 늘 베풀 것이 있는 자다. 우리가 나눌 수 없는 것은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거둘 이도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세상 어느 것 하나도 내 것은 없다는 말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면 마음이 좀 더 홀가분해진다. ‘더도 덜도 말고 팔월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처럼 풍요로움이 있을 때 내 이웃을 생각하고 내가 가진 것으로 함께 나누며 베푸는 삶을 사는 추석이 되었으면 한다.

“내가 느끼는 즐거움과 행복을 다른 이웃에게도 똑같이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어느 연예인의 말이 가슴 깊이 와 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