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호원칼럼-축복의 싹 틔워야 할 자리는 지금의 내 자리


동문기고 안호원칼럼-축복의 싹 틔워야 할 자리는 지금의 내 자리

작성일 2012-06-28
이 세상을 살다보면 똑같은 여건과 환경 속에서도 인간관계를 맺거나 성공에 대해 중요한 부분은 그 사람의 마음가짐과 태도에 있는 것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흔한 말로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고 말을 한다.

그러나 성공적인 사람들을 보면, 그들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그 환경을 지배한다. 그들의 특징은 환경을 탓하지도 않고, 환경을 원망하지도 않는다. 성공적인 사람들은 오직 자기에게 주어진 현실이라고 하는 환경을 언제나 최선의 기회로 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보면서 성경에 나오는 요셉을 생각해 보았다. 그는 17세쯤 어린 나이에 낯설은 이국 땅에 노예로 팔려간다. 그것도 다름 아닌 자기의 사랑하는 형님들에 의해 팔려간 것이다. 세상에 억울하고 분한 것을 생각하면 이 보다 더 속터지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 보통 사람들처럼 좌절하거나 실의에 빠져 현실과 형제를 원망하지도 않았다. 현실을 바라보는 태도와 마음가짐이 우리네와는 달랐다. 이런 요셉을 우리의 삶 속에 있는 환영의 태도를 어떻게 바꾸어야 축복받는 사람이 될 것인지를 한번쯤 생각해 보아야만 할 것 같다.

몇 가지로 요약해 보고자 한다. 우선 첫째로 내가 엮어가는 현실이 미래적 의미를 가진 것인지, 아니면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생각해 보자. 우리는 요셉의 얼굴은 못보았지만 성경을 통해 요셉의 인격을 읽을 수가 있다. 그는 과거의 노예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노예 생활을 하지도 않았다. 육신은 분명 속박받는 노예요, 확실한 노예였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아무도 구속시킬 수 없는 자유의 마음이었다. 그런 그를 보자. 그는 무엇보다도 가까운 형제들로부터 상당한 미움을 받았다. 그러니 요셉은 한(恨)이 맺힐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셉은 ‘한’의 노예가 되지는 않았다. 여기에 보통 사람과는 다른 위대함이 있는 것이다. 그가 섬기는 하나님을 굳게 믿고 있었기에 낙심하지 않았다.

둘째로 지금 처해있는 현실적인 어려운 환경과 여건 속에서도 요셉처럼 희망을 잃지 말고 우등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실적인 요셉을 보면 그 당시 그는 분명 노예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런 환경에서도 자신이 맡은 일에는 최선을 다하는 성실한 노예였던 것이다. 노예는 노예인데 모범생 노예다. 진실하게, 정직하게 살면서 주인의 두터운 신임을 받는 노예다. 노예가 바득바득 애쓰고 산다고 주인이 될 수는 없다. 노예는 노예된 생을 일단 마스터 해야 주인이 될 수 있다.

셋째로 오늘 우리가 어떤 환경에서 사느냐 하는 것보다는 어떻게 살 것이냐를 우선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그 얄궂은 운명의 장소인 애굽은 요셉에게 있어서 영광스러운 삶의 장소로 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디에서 사느냐는 사실에 대해 너무 예민한 반응을 보일 필요가 없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질문은 “나는 오늘 어떻게 살고 있는가? 하나님이 허락하신 이 환경, 이 삶의 자리에서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다.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 주인은 보고 느꼈던 것이다. 그 주인은 요셉처럼 예수를 믿는 사람이 아니었다.

미국 캘리포니아 연안에 위치한 몬트레이 마을은 오랫동안 펠리칸들의 천국이었다고 한다. 어부들이 잡아 올린 물고기를 씻을 때 잔챙이는 모두 버렸는데 이것이 펠리칸들에게는 매우 입맛 당기는 간식거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펠리칸들은 점점 게을러져 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인가 그 잔챙이들이 상업적으로 재활용되면서 펠리칸들의 먹잇감이 사라졌다. 그런데도 펠리칸들은 스스로 먹이를 구할 생각은 하지 않고 여전히 어부들이 버린 것만 기다리다보니 결국엔 펠리칸들이 굶어죽기 시작했다.

이것을 지켜 본 어부들은 생각 끝에 좀 멀리 떨어진 남쪽 지방으로부터 먹이를 스스로 잡을 줄 아는 펠리칸을 몇 마리 잡아다 풀어놓았다. 새로 온 이 펠리칸들이 굶어 죽어가는 펠리칸에게 합류되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새로운 친구들이 능숙하게 물고기를 잡아먹는 것을 보고 그 굶주렸던 펠리칸들이 따라서 물고기를 잡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교육법은 이런 문제에 대해 두 가지 원칙을 가르쳐주고 있다. 하나는 ‘돌아보는 것’이요, 또 하나는 ‘내버려 두는 것’이다. 그들은 철저하게 이 두 가지에 있어 균형을 갖추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지금도 자기가 속해 있는 환경과 남을 탓하며 스스로를 낮추어 자존감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주위에는 너무도 많은 것 같다. 환경에 적응하고 변화시키는 것은 남이 대신해 줄 수 없다. 오직 자신에게 달렸다. 내가 지금 있는 이 곳에서 미래적이요, 희망적이요, 적극적인 태도를 갖고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만 한다.

그래야 요셉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축복을 누릴 수 있을뿐더러 타인의 입을 통해 성공된 자로서의 탄성의 고백이 나올 수 있는 힘있고 능력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만드신 역사의 위대한 인물에게 나타나는 독특한 특징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대부분 광야 학교 출신이라는 점이다. 인생의 한 때를 광야에 버려져서 보냈다는 것이다. 모세도, 다윗도, 세례 요한도, 사도 바울도….

물론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도 마찬가지다. 정말 위대한 인물들은 ‘내버려 두는 훈련’의 과정에서 만들어지는가 보다. 그런 지도자가 나왔으면 하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