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호원칼럼- 불화와 갈등은 탐욕에 있다.


동문기고 안호원칼럼- 불화와 갈등은 탐욕에 있다.

작성일 2012-05-31
지난 28일은 불기 2556년 전 중생의 구제를 위해 이 땅에 오신 부처님이 오신 거룩한 날이다. 그래서 많은 불자들이 이 날을 축하하고 기념하기 위해 사찰을 찾기도 했다. 음력 사월초파일이면 아직 이른 초여름인데 무척이나 후덥지근하다. 또 부처님의 심기도 안 좋은 지 간혹 비까지 내렸다. 아마도 부처님이 이 속세를 바라보면서 빗나간 제자들의 행실을 안타가운 마음에서 흘리는 눈물인지도 모른다.

그 어느 해 보다 더 어수선한 심정으로 석가탄신일을 맞이하는 것 같다. 불자가 아닌 범인(凡人)의 느낌도 그러할 진데 스님과 불자들의 마음은 오죽하겠는가. 모두가 말은 안 해도 착잡하고 괴로울 것으로 판단된다. 서울 시청 앞에 세워진 부처님 봉축 탑에는 ‘마음에 평화를, 세상에 행복을’ 이라는 봉축표어가 무색할 지경이다. 과연 현 시점의 불교는 봉축 탑 표어대로 우리 마음과 우리 사회에 평화와 행복을 주고 있었는가, 묻고 싶을 정도다.

최근 불거진 백양사 도박 폭로에서 비롯된 조계종의 추문과 다툼은 사실 어제 오늘만의 일은 아니다. 오래 곪아 온 환부가 터진 결과 일뿐이다. 늘 터질 때마다 개혁을 부르짖었지만 변하지 않고 있다. 다만 착잡한 것은 모두가 탐욕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특히 올해 사월초파일은 연등회가 중요 무형문화재 122호로 지정된 직후이기에 한층 그 의미가 깊다.

이럴수록 가난한 여인의 정성어린 등불에 부처가 감동했다는 빈자일등(貧者一燈)의 고사를 모두가 뼈저리게 되새기며 참회의 눈물을 흘려야 할 것 같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부(富)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 부처는 우리에게 번뇌의 뿌리인 모든 관념을 버리도록 도우셨고 이 비어있음에 집착함도 크게 나무라신 분이다.

‘금강경’에 보면 “무릇 모든 상(相)은 다 허망하니 만약 모든 상이, 상이 아님을 본다면 여래를 보리라”라는 부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상’은 말 그대로 모습을 말한다. 이 ‘나’ 라고 하는 몸과 마음도 사실은 허물이며 허공 속 꽃잎과 같은 존재일 뿐이란 뜻도 내포되어 있다.

이번에 사단이 난 도박사건과 관련, 거론되고 있는 자승과 명진 스님은 오래 전부터 친형제처럼 지낸 사이지만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금이 갔고 결국엔 이 지경에 이르렀다. 모두가 부처의 가르침을 따르기보다는 세속적인 삶에 깊이 빠져 정치승려로 변해 권력과 돈맛에 깊이 빠진 것이 이 같은 파탄을 만든 것이다. 누구를 탓 할 수도 없다. 불교를 세속에 이용하려는 정치인의 책임도 크지만 무엇보다 수행에 전념해야 할 수도자들이 정치권력을 활용해 종단 권력을 추구하려는 정치승의 책임이 크다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종단의 역사로 보면 한 마디로 연목구어(緣木求魚)다. 작금의 행태를 옷 두벌로 40년을 지냈고 물욕을 멀리 하셨던 성철 스님이 보셨다면 과연 무슨 말씀을 하셨을까? 평소 짚고 다니던 지팡이로 등이라도 후려치지 않으셨을까. “이놈들아 정신 차려! 중생을 구도해야 할 놈들이 뭣 하는 짓거리냐” 라고 꾸짖었을 것 같다.

또 지난 2010년 3월 입적하신 법정 스님의 가르침이 떠오른다. “장례식을 치르지도 마라. 수의도 준비하지마라 그리고 평소 입던 무명옷을 입혀라. 관(棺)도 쓰지 마라. 강원도 오두막 대나무 평상위에 내 몸을 놓고 다비(茶毘)해라. 사리도 찾지 마라. 남은 재는 오두막 뜰의 꽃밭에 뿌려라.”무소유를 설파해 온 법정 스님의 유언이다.

조계종 승려들의 도박파문과 이어지는 폭로. 추문. 세상이 종교를 걱정해야하는 요즘, 스님의 추상같은 모습이 더욱 그리워지는 때다. 법정 스님이 생전에 강조한 ‘무소유’ 정신만 제대로 실천되었어도 지금 같은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멀리 볼 것도 없이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불화와 갈등은 탐진치(貪嗔痴)가 주원인’이라는 조계종 종정 진제 스님의 봉축법어를 한 번쯤은 상기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탐욕, 성냄, 어리석음을 떨쳐버리라는 말씀은 모두가 귀담아 들어야 할 가르침이다.

지난 해 인구에 회자됐던 “종교가 세상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세상이 종교를 걱정하는 시대”라는 말처럼 바깥세상으로 터져 나오는 잡음이 너무 크고 잦다.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면서 진정한 종교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음미 해보았으면 한다. 우리는 스님 보러 절에 가는 게 아니라 부처님을 만나러 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 범인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 소중한 생명의 씨앗을 움틔우며 꽃을 피우고 그리고 열매를 맺은 후 언젠가는 한 줌 흙으로 돌아갈 존재다. 그래서 내 미래의 중생들에게 그리고 후손들에게 좋은 밑거름, 좋은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는 한 줌의 흙이었으니 말이다. 다행히 선방 수좌들이 ‘부처님 오신 날 목 놓아 통곡하며’ 라는 성명을 냈다.

종단에 모든 것을 내려놓자는 어려운 주문이다. 흐트러진 승풍(僧風)을 다시 세우자는 것이다. 절대자의 구원이 아니라 오로지 스스로의 노력과 수행에 의해서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게 불교의 본질이 아니겠는가. 이제는 고질병의 뿌리를 뽑아야 한다. 뿌리는 돈이다. 정치권력은 각종 명목의 예산지원으로 종단을 미혹한다. 정치승은 돈으로 종단 권력을 사고팔고 유지하고 누린다. 돈 만지는 게 바로 파계다.

‘맹수의 왕 사자는 자기 몸 속의 벌레한테 잡아먹힌다.’는 부처님의 경고가 와 닿는다. 불교는 무소유며 비구는 ‘걸식’(乞食)이다. 정치승의 참회와 각성을 기대하기보다 종단 구조를 혁신해야 한다. 승려들은 돈에 대해서는 관여치 말게 하고 오직 수행에만 전념토록 종법을 개정해야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사부대중 모두가 나서야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국 사찰을 중심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묵묵히 돕는 스님, 불자들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무수히 많다. 왜 영성(靈性)이고 불심(佛心)인가. 현대인의 삭막한 마음을 촉촉이 적셔주고 어루만져주는 종교 본연의 임무를 불교계가 다시 한 번 자각 할 때라고 생각된다.

바람이 있다면 종교가 생겨난 궁극의 목적에 충실한 불교의 본래 자리를 찾았으면 참 좋겠다. 아마 죤 강의 부족들은 ‘자연에서 흘러와 자연으로 흘러가는 인생이라 소유의 개념이 없다’ 그래서 모두가 평온하다. 우리에게 귀감이 되는 삶의 모습이다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 이 칼럼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