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기고
안호원칼럼-우물 같은 나눔의 삶
이 세상에서 채우지도 않고도 퍼먹기만 하는데도 여전히 채워지는 것이 있다. 분명 쌀독엔 쌀을 넣은 후에야 퍼먹을 수 있고 장독엔 장이 담겨있어야 꺼내 먹을 수 있다. 그런데 채우지 않고도 그저 끊임없이 퍼먹기만 하는 희한한 것이 하나 있다.
지금은 그 이름조차도 기억에서 잊혀진지 오래인 우물이다. 우물에 물을 채워 넣고 나서 물을 퍼먹는 어리석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저 끊임없이 솟아나는 우물물을 계속 퍼먹기만 하면 된다. 한 바가지를 푸면 한 바가지만큼, 열 바가지를 푸면 열 바가지만큼, 박박 긁어서 바닥이 드러나도록 퍼내도 잠시 후면 신기할 정도로 퍼낸 물이 채워진다.
이런 우물의 또 하나의 신비한 특징은 퍼서 나누어주는 만큼 우물의 물은 채워지지만 우물을 사용하지 않으면 우물에 차 있는 물의 무게 때문에 물이 더 이상 솟아나지 않고 오히려 물 샘이 막히면서 우물이 말라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우물은 끊임없이 사용하는 자에게만 마르지 않는 참된 축복의 샘이 된다. 이 축복의 우물은 마르지 않는 만큼 생겨나는 신기한 샘물이다.
생텍쥐페리의 말처럼 사막이 아름다운 이유는 사막 어딘가에 샘물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 삭막한 세상이 그래도 아름다운 이유는 그 어딘가에 퍼내도, 퍼내도 마르지 않는 샘솟는 우물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도 이와 마찬가지다. 이웃을 생각하고 나누면 나눌수록 채워지지만 움켜쥐고 있으면 고인물이 썩는 것처럼 악취를 풍기게 된다.
보통 하는 말인데 두 손에 보리 한 줌씩 쥐고서야 쌀가마니를 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큰 것을 얻기 위해서는 한 줌 밖에 안 되는 것쯤은 과감히 버릴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의 욕심이 어디 그렇게 행하기가 쉬운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김이 무럭무럭 나는 하얀 쌀밥과 소찬(素饌)에 만족할 줄 모른다. 고기반찬, 진수성찬을 찾고 조금이라도 여유가 생기면 별미 음식을 하는 맛집 기행에도 서슴지 않고 나서기도 한다.
허기사 기왕에 이 세상에 태어난 거라면 대박 한 번 터뜨려보고 싶은 게 인간 본능의 욕망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 모든 것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다. 일반적인 말로 열심히 공부하고 부지런히 일하는 게 우선이다. 이런 사고는 일반 대중의 사고다. 따라서 세상 사람을 바르게 교화시키는 종교 지도자들은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종교계 지도자들이 제사에는 마음에 없고 오직 젯밥에만 마음을 두고 ‘예수’와 ‘석가’의 이름을 팔아 호의호식(好衣好食)한다. 최근 조계종 지도급 승려들의 호텔 도박사건에 대한 시중의 비난 여론이 거세지고 있다. 사실 선(禪)을 쌓고 덕(德)을 베풀 종교 지도자들의 이 같은 비행은 어제오늘의 일 만이겠는가 마는 한국 기독교나 불교가 쇠퇴기에 접어든 주요인을 보면 세속적인 권력과 돈에 너무 가깝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그간 불교를 비롯한 기독교가 중생(衆生)들에게 걱정을 끼친 모든 사건의 원인을 보면 자리(감투)다툼과 돈이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거의 다 측근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비롯된 폭로성 사건이다. 이번 조계종 도박 동영상 파문도 결국 조계종 제도권과 총무원 불만 세력이 폭로전을 통해 충동하는 양상이다.
시정잡배와 다를 것이 없는 다툼을 한다. 제 얼굴에 침 뱉기 식인데도 승복을 입고 다니는 것을 부끄러워 할 줄 모른다. 이처럼 승려들의 도박 동영상 파문이 총무원장 등 종단 수뇌부에까지 불통이 뛰는 이유는 무엇일까. 총무원장에 대한 구원(舊怨)이 작용한 결과라는 분석이다.
도박 동영상을 처음 고발한 성호스님의 경우 현재는 승적이 박탈된 사람이고 ‘기획폭로’ 한 것으로 지목받는 전 조계종 종책 특보 김영국 씨는 지난 2010년 3월 당시 봉은사 주지인 명진 스님 편에 섰다가 민주통합당 불교특위원장을 그만 둔 사람이다. 더 큰 문제는 명진 스님이다. 한 때 총무원장과는 사이가 좋았으나 봉은사 주지직을 내놓으면서 총무원장을 ‘정권의 하수인’이라며 거세게 비판해 왔기 때문이다.
모두가 자신의 신분을 잊은 채 세상 사람과 다를 바 없는 탐욕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옳고 그름을 떠나 과연 이런 추태를 지켜보는 불자들의 마음은 어떻겠는가. 이를 보면서 과거 조선에서 억불책(抑佛策)<태종실록 5년 11월21일>을 시행한 이유를 알만하다. 이는 승려들이 불심(佛心)은 없고 오직 사찰 재물을 탐하는 탐심(貪心)이 있었음을 입증해주는 것이다.
몇 해 전 열반한 무소유의 법정스님이 불교계의 이런 추한 행태를 보았으면 어떤 마음이 드셨을까. 또 무슨 법어를 말하실까?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는 옛말도 있듯 사람들은 어떤 사물을 보면 갖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되면서 집착이 생기게 되고 번민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이 부분에서 승려들이 중생들과 다른 것은 탐욕을 버릴 줄 안다는 것이다. 무소유를 말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소유는 괴로움도 따르지만 즐거움도 있다. 그러나 무소유면 괴로움은 당연히 없겠지만 즐거움 또한 없다는 것이다. 결국 무소유는 괴로움도 없애지만 즐거움까지도 모두 버리는 것이다. 특히 종교인들이라면 그게 가능하다. 그렇다. 이르지도 못할 것이라면 버리는 것이 맞다. 그래서 법정 스님은 무소유를 말한 자신의 책까지 버리라고 했나보다.
유대인의 왕이신 예수도 평생 무소유였다.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태어났다. 또한 평생 하층민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지도 않았다. 사회의 하층민을 섬기는 예수는 “여우도 굴이 있고,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태복음 8:20>고 말씀하신 것처럼 평생을 집 한 칸 없이 지냈다.
조계종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집행부 일괄사표와 함께 ‘대국민 참회문’을 발표하는 등 총무원장 자승 스님이 참회의 108배를 하고 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 아니던가. 산중 불교의 공(空)의 정신으로 되돌아가지 않는다면 이런 악습은 거듭되며 세상 사람들에게 비난의 대상이 될 것이다.
한국 사회의 일부 종교인이 사회의 등불과 소금이 되기는커녕 사회의 우환(憂患)이 된지는 이미 오래 되었다. 그 근본 까닭은 섬기는 자세가 아니라 섬김을 받으려는 오만의 마음과 재물을 탐하며 심지어는 자식에게까지 세습하려는 사욕(私慾)에 있다.
예수나 석가의 가르침이나 생애와는 정확히 다른 반대편 끝 지점에 있는 것 같다. 바람이 있다면 나눌수록 커지고 나눈 만큼 샘솟는 우물의 축복을 함께 나누는 아름다운 세상이 되었으면 한다.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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