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기고
안호원칼럼-사양지심
사양지심辭讓之心
한 남자가 코끼리에게 쫓기고 있었다. 너무 급한 나머지 칡넝쿨을 타고 우물로 내려갔다. 알고 보니 우물 바닥에는 독사가 커다란 아가리를 벌리고 혀를 날름거리고 있다. 어디 그 뿐이겠는가. 우물 중간 벽에는 아주 작은 뱀들이 기어오르고 있다. 설상가상 흰쥐와 검은 쥐가 번갈아 칡넝쿨을 갉아 먹고 있다.
이제 그야말로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은 시간문제. 그런데 어디선가 날아온 벌 다섯 마리가 칡넝쿨 윗부분에 집을 짓기 시작한다. 꿀이 한 방울씩 그 남자의 입가에 떨어진다. 달콤하다. 남자는 순간 자신의 처지를 잊은 채 왜 꿀이 더 떨어지지 않나 하는 생각에 빠져있다. 잠시 후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이 이야기는 어리석은 인생에 대한 비유라 할 수 있다. 코끼리는 세월, 독사는 죽음, 흰쥐와 검은 쥐는 낮과 밤, 작은 뱀은 질병, 그리고 벌 다섯 마리는 인간의 오욕(五慾) 즉 재물 욕, 색욕, 식욕, 명예욕, 수면욕이다. 곧 죽어질 육신인줄 모르고 순간의 탐욕에 빠져 정신없이 세월을 흘려보내는 게 우리네 나그네 같은 인생살이라는 거다.
그런 까닭에 불가에서는 중생들에게 부단한 수행을 강조한다. 그래야 어리석음에서 깨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누구에게나 불성(佛性)이 잠재해 있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마음을 갈고 닦으면 허망한 행복이 아니라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모두가 말뿐, 나약한 인간이 절대적인 행복의 경지, 해탈(解脫)에 이르기까지 온갖 번뇌와 욕망, 집착을 철저히 내려놓는 일이 그리 말처럼 쉽겠는가.
그러니 정치권, 기독교계가 돈 봉투 사건으로 국민들을 놀라게 하더니 급기야 이에 뒤질세라 불교계까지 주지 선출을 놓고 흑룡의 해 임진년 새해벽두부터 금품수수의혹이 불거지면서 중생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 정치권은 그렇다 치더라도 종교계까지 이 모양이니 이 세상이 맑을 턱이 없다.
정치인들은 국민을 팔아먹고, 기독교는 예수를, 불교는 부처의 이름을 팔아먹고 사는 썩은 지도자들이 너무 많은 것 같다. 그러니 이 땅에 썩은 냄새가 코를 찌르도록 진동하는 게 아닌가. 특히 정권 임기말이 다가오면서 자칭 사회지도층에 있다는 자들이 싸질러 놓은 똥덩어리들이 사방천지에 널려 고약한 악취를 풍기고 있지만 모두들 그냥 깔아 뭉개고 끗발 없는 좀 도둑들만 잡혀간다.
“중생들은 많이 가지려하고, 또 많이 얻으려하면서 마음의 고통이 생기지만 참선 수행을 연마하면 고통과 원망이 사라지고 결국 사바세계는 깨끗해 질 수 있다.” 뉴욕 유대교당 템플 임마뉴엘에서 열린 세계종교지도자 회의에서 불교계 대표로 참석한 진제스님의 말이다.
최근 들어 이 정부의 임기 말 이 대통령 측근비리 수사를 지켜보면서 진제스님의 말씀을 되새겨보았다. 자형인 이상득 의원의 공천헌금 비리의혹, 멘토인 최시중의 측근비리, 친이계 의원 돈 봉투 살포 의혹, 사촌처남인 김재홍의 구명로비청탁 4억원 수수의혹 등에 대한 혐의로 수사가 시작됐다. 물론 본인들의 말대로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지만 모두 어리석은 인생을 사는 것 같아 측은한 생각이 든다.
결국 작은 것을 탐하다 더 큰 모든 것을 잃는 우(愚)를 범하는 것이다. 현재 우리 사회의 시끄러운 문제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결국 예(禮)의 총체적 실종에 있다고 생각된다. 정계, 종교계, 재계에서 연일 터지는 각종비리 사건에 이어 다이아몬드 게이트까지 가세한 것은 이들 사회 지도층 인사들에겐 국가와 국민에 대한 기본적 예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사실을 여실히 드러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예’는 사양하는 마음이다. 사양은 내가 하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을 타인에게 이익을 따지지 않고 조건 없이 양보하는 마음이다. 따라서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대기업이 커피, 빵집, 떡볶이까지 넘보는 행위나, 대기업 소유의 기업형 슈퍼마켓(SSM)이 구멍가게와 전통시장 영세 상인들의 생계수단을 잠식하는 행위, 그리고 약사들이 일반의약품마저 독점하려고 국민건강안전을 내세워 슈퍼판매를 반대하는 행위 등은 당연히 비례(非禮)라 말할 수 있다.
조선후기 수구적 유학자들이 기득권수호를 위해 예학을 악용하면서 ‘예’의 의미가 잘못 해석되었는데 사실 ‘예’는 기본적으로 남과 더불어 살자는 공존의 지혜다. 나도 배부르게 먹고 싶지만 남에게 양보해야 모두가 평화스럽게 살 수 있다는 공존의 철학이다.
자고로 사단(四端)과 대립되는 것이 희(喜), 노(怒), 애(哀), 락(樂), 애(愛), 오(惡), 욕(慾)의 칠정(七情)이다. 인간 성선설의 근거가 되는 사단은 맹자가 한 말인데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이 인(仁)의 실마리고, 악(惡)을 미워하는 마음이 의(義)의 실마리고, 사양하는 마음이 예(禮)의 실마리고,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이 지혜의 실마리다”라는 것이다.
따라서 칠정에는 심(心)자가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칠정대로 행하면 이 세상은 시끄러워질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모두가 칠정대로 산다면 인간은 짐승과 다를 바 없고, 세상은 지옥이 되는 것이다. 이를 방지하자는 것이 ‘예’(禮) 고 사양지심(辭讓之心)이다.
공자는 말한다. “하루라도 자기를 극복하고 '예'로 돌아가면 천하가 다 ‘인’으로 돌아갈 것이다.” 라고.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 아무래도 ‘사양지심’ 네 글자를 벽에 써놓고 매일 같이 보아야 할 사람들이 너무 많아 보인다. 오욕(五慾)과 칠정(七情)에 빠져 악취가 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세상에 널려있다.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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