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호원칼럼- 구토물을 되새김하는 미래


동문기고 안호원칼럼- 구토물을 되새김하는 미래

작성일 2011-11-10
연말이 가까워지면서 동창회다 친목회다 해서 각종 모임이 많아지고 있다. 그런 모임에 여 러번 참석을 하다보면 묘한 마음이 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대체로 모임이 있기 전, 그 모임에서 만난 사람들과 나눌 대화 등에 대해 설레는 마음으로 가지만 막상 모여서 음식을 먹고 대화를 나눈 후 귀가 할 때가 되면 미묘한 허탈감을 갖게 된다.

어떤 경우 왜 이런 모임에 기대를 걸고 왔는지를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마당발처럼 바쁘게 뛰며 똑같은 설렘과 기대감을 갖고 많은 모임에 참석해보지만 언제나 돌아오는 것은 실망감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재물은 요술쟁이처럼 무엇이든지 이루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재색(財色)을 누군가 먹고 다시 토해 내서 보면 우리는 역겨움을 금할 수 없게 된다. 불가에서는 흔히 “재물과 색의 화(禍)는 독사의 독보다 심하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우리 범인(凡人)은 재물과 색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는 쉽지 않다. 남근(男根)을 자르고 사는 내시나 80세가 된 노인에게도 아직 색심(色心)은 남아 있다고 한다.

예수는 여자를 보고 음흉한 마음을 품어도 색으로 보았지만 그런 색심도 결국은 건강한 육체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우리가 날마다 죽자 살자 하면서 취하려고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재색으로 이루어진 저 구토물이 아니던가.

물론 직접적으로 더러운 구토 물을 먹으려 할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씻어 말리거나 남이 말끔하게 닦아 놓은 것을 먹는 데는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재색이 독사보다 더 지독한 화근이라면 구토되거나 배설되지 않는 재색은 있을 수 없다. 아무리 맑고 청초하고 고상하게 보이는 재색도 똥 속의 과일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저 구토 물을 계속 먹기 위해 과욕을 부려도 좋은가. 그렇지 않다 아무리 좋은 사람들과 만나는 일도 반복되면 권태가 따르게 마련이다. 재색도 마찬가지다 계속 먹으면 부질없는 일이란 것을 깨닫게 된다. 단지 오지 않은 미래의 것으로 가정해 그리워하는 것뿐이다. 노인들은 젊은 남녀를 만나면 “참 좋은 때야” 라는 말을 한다. 그리고 자신도 다시 젊어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상상하기도 한다.

부처가 젊은 제자와 산책을 하다가 연못 쪽을 가리키며 “물이 말라 고기가 없는 연못가에 쓸쓸히 서 있는 저 늙은 왜가리가 보이느냐?” “예, 보입니다. 힘이 없어 날지를 못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젊음이 잠깐 일 줄 모르고 배우지 않고 일할 나이인데도 마음에 맞지 않는다며 일하지 않고 스스로 재물 모을 기회를 잃어버린 채 늙어버린다면 저 늙은 왜가리가 고기 없는 빈 연못을 바라보며 쓸쓸히 서있는 것과 똑같이 된다.”

누구든지 늙어가지 않는 사람이 없다. 이는 늙어가는 다른 사람의 모습에서 자기를 비춰 볼 줄을 알아야 한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말 해주는 것이다. 젊음도 잠깐이다. 거리에 떨어져 나뒹구는 낙엽을 바라보라. 언제나 푸르른 잎으로 있을 줄 알았으나 때가 되면 퇴색되어 가지에서 떨어진다는 것을….

우리의 삶도 그런 것 같다. 아무리 젊음을 반복할 지라도 늙음 또한 그만큼 반복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 윤희의 놀음이 부질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젊어지더라도 기껏 한다는 일은 저 구토 물을 되새김하는 것뿐이다. 재색으로 이루어진 구토 물은 온 세상에 가득 차 있다.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날마다 배가 터지게 퍼먹더라도 반드시 토해내거나 똥을 싸야 한다. 어디로 가져가거나 숨길 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나 할 것 없이 전쟁 소문에 사재기하듯 저 구토 물을 필요 이상으로 좀 더 많이 취하려고 살생까지도 마다 않는 세상이 되어 버렸고 이로 인해 온갖 다툼과 고통이 우리 마음에 생겨났다. 내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내 부모가 있어서인데 그 부모를 귀찮다고, 불편하다고 내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강원도 철원 지장 산골짜기에서 숲 속 새들과 살아가는 도연 스님의 “집도 절도 없는 새야말로 무소유와 인욕정진(人慾精進)의 표상” 이라던 말이 가슴 깊이 파고든다. 어째서 인간은 날지도 못하고 자동차나 비행기를 타야 하는지 그리고 왜 그렇게 많은 집이 필요한지, 또 권력을 쥐기 위해 정적을 죽이고 심지어는 전쟁까지 일으켜 서로를 죽이고 죽는 인간들, 새들 편에서 보면 이런 인간들은 참으로 쓸데없는 일에 목숨을 걸며 사는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동물이다.

제발이지 이 세상을 삼킬 미래의 것으로만 보지 말고 토해진 과거의 것으로도 볼 줄 안다면 우리의 헐떡거림은 훨씬 줄어들지 않을까. 똥도 덜 쌀 것 같다.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 이 칼럼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