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호원칼럼- 나를 누구라 하느냐?


동문기고 안호원칼럼- 나를 누구라 하느냐?

작성일 2011-09-08
TV를 시청하다보면 ‘달인’들이 나오는 것을 자주 보게 되는데 그들의 공통점이 하나 같이 똑같다. 모두가 “오랫동안 하다보면 누구든지 다 할 수 있는데요. 뭐” 하면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겸손해 한다. 그들이 더욱 존경스러운 맘이 든다. 이런 생각은 요즘 정치계에 역풍을 몰아치며 여ㆍ야는 물론 재야 진보시민단체들에까지도 간담을 서늘케 했던 안철수 교수의 신드롬을 떠올리면서다.

성경에 보면 예수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묻자 많은 제자들이 ‘더러는 세례요한, 더러는 엘리야, 또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한다고 했다. 그러나 수제자인 시몬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고 대답했다. 그 말은 맞다.

안 교수 역시 자신도 어느 정도 정치에 관심을 가졌겠지만 오 시장이 패배의 잔을 마시면서 안 교수의 주변 사람들이 그에게 서울 시장 출마를 권유하며 ‘남들이 뭐라 카드라’ 하면서 부추겨 왔을 것으로 보인다. 그로 인해 정치계를 바짝 긴장시키며 자신에 지지도도 확인했고 또 그런 폭발적인 지지에도 불구하고 출마를 선뜻 양보함으로서 권력욕과는 거리가 멀다는 좋은 이미지도 함께 구축하면서 여러 가지로 얻은 게 많다.

그 성과 덕분에 이제는 서울시장이 아니라 대선 후보군에까지 오르면서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 측이 긴장이 될 정도로 새로운 별로 부상했다. 암튼 이미지 굳히기에 성공한 셈이다. 그런 안철수 교수가 서울시장 출마 포기를 선언하면서 “사회를 먼저 생각하고 정직하고 성실한 삶으로 보답하겠다”고 소감을 피력했다.

그러나 안 교수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안 교수는 불과 몇 달 전 원대한 과학의 꿈을 펼치기 위해 서울대학교융합과학대학원의 원장으로 취임하는 용단을 내리면서 세인들의 이목을 끈 바 있다. 물론 대학원장직에 있으면서 정치를 넘나들 수도 있고 자신의 의도를 소신 있게 밝힐 수도 있다.

그러나 엄밀하게 짚고 넘어가자면 이번의 돌출 행동은 안 교수에게 기대를 걸고 있는 많은 학생과 학교측에 대한 도리는 아니라고 본다. 한마디로 힘있는 자만이 갖는 배신이다. 사실 안 교수의 서울시장 출마설로 여ㆍ야는 물론 학생과 학교, 그리고 다수의 시민들에게 숱한 당혹감과 실망을 안겨준 것은 사실이다.

안 교수에게 권면하고 싶은 것은 이제는 자의가 되었든 타의에서든, 자신에 대한 지지도도 확인했으니 이쯤에서 정치는 접고 교육자의 길로 나가는 게 순리라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 같은 지지도를 계기로 주위에서는 대권 대망론을 불 지피기에 열을 올리는 것 같은데 슬기롭고 지혜로운 안 교수가 정치권에 말려들어 이제껏 쌓아올린 형설의 공이 모두 무너지면서 마음에 상처를 입지 않았으면 한다.

문국현. 박찬종씨의 경우를 보라, 그리고 이회창씨를 보라. 선거는 뚜껑을 열어보아야 안다. 인기와 투표는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도 지도자감이라고 충동질을 하면서 안 교수를 부추기는 무리들도 있지만 안 교수를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하며 그의 진흙탕 속의 정치진출을 안타까워하는 많은 이들의 우려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가이샤의 것은 가이샤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이와 마찬가지로 다 역할과 구분이 있고 몫이 있는 것이다. 오히려 안 교수는 흙탕물의 정치라도 정치는 정치권에 맡기고 전공을 살려 국가를 발전시킬 수 있는 미래의 젊은 지도자들을 양성하는데 전력을 다해야 옳다.

특히 안 교수는 출마설을 흘리면서 대통령자리는 몰라도 서울시장의 경우 혼자도 할 수 있는 자리라고 말했는데 이는 커다란 오산이고 착각이다. 또 ‘나’에 대해서도 많은 고민을 한다고 했다. 학교교육은 가르치는 자가 자기 소신대로 가르칠 수 있지만 정치나 행정은 그렇지 않다.

굳이 전 서울시장을 사례로 들지 않아도 서울시행정은 서울 시장 혼자는 할 수 없다는 것을 감히 지적한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면 참으로 위험한 발상이다. 그런 행동은 독선이고 독재다. 의회정치, 민주주의를 내세우는 우리나라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더 나아가서는 서울시민을 너무 얕잡아 보고 우습게 보는 처사다. 오만함이 도를 넘었다 할 수 있다.

학문은 이론과 지식과 감성으로 전달이 가능하지만 정치와 행정은 이론과 지식만으로는 할 수 없다. 일례로 운동권사람들의 경우 남을 지적하며 행동으로 바람을 불게는 하지만 정책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운동권자와 정치권은 유권자들이 구분해야 하는데 다수의 유권자들,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는 그만한 판단력이 부족하다. 그런 자들이 정치를 하니 국정운영이 개판이고 국민들은 힘들게 사는 게 아닌가.

‘나’(自我) 하나의 판단이 때로는 많은 사람들에게 행ㆍ불행을 안겨주고 심지어는 국가를 위기로 몰아넣을 수도 있다. 그래서 지도자는 잘 뽑아야 한다. 평소 존경을 받고 훌륭하게 생각했던 사람들도 청문회에 나오기만 하면 하나 같이 도덕성에 문제가 많은 것으로 드러난다.

많은 국민들을 실망시킨다. 그게 정치세계의 현실이다. 그래서 안 교수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정치에 미련을 두지 말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안 교수가 학자로서는 뛰어날 수 있어도 정치와 행정은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미숙한 운전자가 대형차를 운전하면 사고 날 확률이 아주 높다. 또한 단맛을 내는 설탕도 도가 지나치면 단 맛을 잃고 쓴 맛을 낸다. 품격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좀 더 자기를 낮추고 겸손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존경심도 오래 간다.

우리는 각자 자기 있는 자리에서 자기 근기(根器)에 맞게 수행하며 정신적 진화를 거듭 한다. 나 하나가 때로는 아버지 노릇도 하고, 아들 노릇도하고, 남편 노릇도 하고, 주인노릇도 하고, 하인 노릇도 한다. 이 때 어느 노릇 하는 나를 진정 나라고 말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수없이 많은 노릇을 하면서도 숨 쉴 사이 없이 찰라 찰라를 놓고 가는 인생이다. 그래서 안 교수가 말하는 진정한 ‘나’ 가 내 안에 없다. 지금도 수없이 내 안에서 많은 노릇을 노련히 하게 하는 그자는 누구인가. 안철수 교수, 당신은 그 자가 누구인지 아는 가. 그렇다면 말하라. 진정한 나는 누구인가를? 또 세상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 하는가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는 인간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선택하면서도 세상의 왕을 선택하지는 않았기에 2100년이 넘도록 우리에게 기억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설 자리를 알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