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기고
안호원칼럼- 하나님의 배려
모든 인간은 예상치 못했던 상황과 시기에 찾아오는 두려움에 노출되고 있다. 질병, 죽음, 이별, 실패, 좌절, 고난의 연속, 그리고 불행이란 검은 옷을 입고 갑자기 다가오는 두려움은 끊임없이 우리네 인간들을 불안에 떨게 하고 위협한다.
무엇보다도 인간을 불안하게 만드는 두려움은 ‘불확실성’ 이다. 우리는 그것을 흔히 ‘예기불안’(Anticipatory anxiety)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예기불안은 앞으로 미래에 어떤 일이 있을까를 미리 염려하면서 불안해하는 병이라 말 할 수 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신(神)에게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신이시여, 당신은 왜 인간을 두려워하는 존재로 창조하셨습니까?” 이 같은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의외로 아주 간단하다.
첫째로 두려움은 연약한 피조물인 인간에게 용기를 주기 위한 하나님의 지극한 배려인지도 모른다. 참으로 우리는 두려움이 올 때마다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 월터 앤더슨이라는 작가는 ‘삶을 바꾸는 내 안의 힘’ 이란 글에서 이렇게 말을 했다.
“용기는 우리가 두려움을 느낄 때 생기는 것임을 명심하십시오. 당신이 도전해야 할 무엇인가가 있다면 어느 정도 긴장을 해야 합니다. 용기는 두려움 없이는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용기는 두려움의 산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절대자인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용기를 가지라고 두려움을 느끼는 존재로 창조하신 것 같다.
둘째로 두려움은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메시지인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만일 인간이 두려움 같은 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신(神)을 의지하지 않을 것이고 아울러 하나님을 찾지도, 붙잡지도 않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에 두려움의 씨앗을 심어놓아 신을 찾도록 한 것 같다.
서양속담에 “흐르는 물에서 돌을 치워버리면 그 개울물은 노래를 잃어버린다.”는 말이 있다. 돌이 가로막고 있기에 개울물이 졸졸졸 소리를 내며 흘러가는 것이다. 그와 같이 장애물로 인해 두려움이 찾아올 때 신을 찾는 아름다운 기도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이리라.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자. 우리가 가는 길에 큰 장애물이 있어도 그렇게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그 이유는 아무리 큰 장애물이라도 흐르는 물을 막을 수 없고 아무리 크고 거친 돌이라 할지라도 물을 만나면 둥글게 다듬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가는 길에 거침돌이 있고 장애물이 있다고 해서 두려워하지는 말아야 한다.
두려움은 인간을 겸손하게 만들기도 하는 것 같다. 하나님이 주시는 두려움은 때로는 당신의 자식들을 겸손하게도 만든다. 두려움이 없었더라면 인간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교만할 수밖에 없다.
일례로 아담과 하와를 보라. 인류 최초의 부부인 그들은 죄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맘대로 하되 ‘선악과(善惡果)’ 만큼은 먹지 말라고 신신당부하고, 먹으면 죽는다고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죄의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뱀의 유혹에 빠진 그들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인해 죄를 먹게 되었고 자신들의 벌거벗음에 대해 부끄러운 줄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처럼 동등하게 되려는 그 교만으로 인해 결국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어 여자는 잉태의 고통을, 남자는 땀을 흘려야하는 노동의 고통을 당해야만 했다.
며칠 전 중국 여행길에 배를 타고 오다 바다 한 가운데서 태풍을 만났다. 어두운 밤, 폭우와 함께 검푸른 파도가 3층 갑판까지 치솟아 오르고 배가 흔들려 가방과 화분들이 이리 쏠리고 저리 쏠려 깨지고 승객들도 침상에서 밀릴 정도로 배가 심하게 흔들렸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사투를 벌리는 망망한 대해(大海)속에서의 두려움과 공포감은 그 무엇으로도 표현 할 수가 없었다. 많은 생각도 떠오르고 후회도 해보면서 만감이 교차되는 순간이었다.
문득 성경 한 구절이 떠오른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배를 타고 가는데 갑자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들어오자 제자들이 두려워 떨며 죽게 되었다고 소리를 치자 예수님께서 바람을 꾸짖으시고 바다더러 잠잠 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바다도 잔잔하여지더라.’
그래, 나도 주님께 비바람과 바다를 잠잠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자. 즉시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았다. 그러나 두려움에 떨면서도 그 와중에 교만한 마음을 버리지는 못한 것 같다. “살려만 주시면 주(主)의 일을 하겠습니다.”가 아니고 “주의 일을 할 수 있도록 살려주옵소서.”라는 기도를 했던 것이다.
이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드리는 기도이지만 살아서 하나님께 한 약속을 지킬 자신이 없고 또 두려웠기 때문에 아무리 위급 상황이라도 감히 서원을 할 수가 없었다. 서원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알기 때문이었다. 새벽녘 배가 좌우로 너무 흔들리니까 몇몇 승객들이 내게로 다가와 “목사님 기도 좀 해주세요.” 한다. 나약한 인간이기에 두려울 때는 어쩔 수 없이 절대자인 신을 찾게 되는 모양이다.
암튼 이렇게 기도에 응답해주시고 살려주신 것을 보면 어디인가엔 쓰시긴 쓰실 모양이다. 누구에게나 불시에 찾아오는 두려움, 행여 두려움이라는 불청객이 찾아오거든 겸손한 피조물의 자세를 취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맞이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