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기고
안호원칼럼-일본, 대재앙에서 얻은 교훈
운명은 선택할 수 없으나 그 운명을 맞이하는 태도는 선택할 수 있는 것 같다. 외국인들이 속속 일본을 떠나는데 반해 일본인들은 쓰나미가 휩쓸고 지나간 집터로 다시 돌아와 밥을 지어 먹고 있는 장면이 방영되는 것을 보았다.
더욱이 자연의 대재앙 앞에 망연자실하면서도 슬픔을 가슴속 깊이 억누르며 참아내는 일본의 국민성을 보면서 운명을 맞이하는 태도는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 쓰나미, 지진, 화산 폭발은 아무래도 한국인에게는 낯설고 생소하기만 하다. 그래서 재해에 대응하는 일본인의 방식은 새롭고 강렬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그 와중에도 줄서기와 순번 지키기에 착실하다. 주유소, 슈퍼마켓의 새치기, 끼어들기도 없고 상점을 약탈했다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또한 개인의 이기적 돌출도 없으며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이 크다. 방사선이 누출되어 생사의 갈림길에서도 그 같은 집단적 질서의식은 우리네가 보기에는 경이롭기만 하다.
국가적 슬픔의 무게는 엄청나다. 하지만 절망의 한 복판에서 울부짖음이 없다. 흐느낌은 작고 슬픔은 삭인다. 특히 일본 TV에서는 유가족의 통곡을 찾아볼 수 없고 시신(屍身)등은 아예 비취지도 않는다. 한국인과 한국 언론과는 완전 대조적이다. 한마디로 절규와 분통, 원망, 고함과 호들갑에 익숙한 한국인에게는 그야말로 충격적이다.
이 같은 일본인의 침착과 질서는 지진에 익숙한 그들이 평소 때 훈련을 잘 실시한 결과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남을 생각하는 배려 정신에서 나온 것이라고 본다.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일본인은 본능적으로 꺼린다. ‘메이와쿠’(미혹迷惑), ‘가케루나’(폐를 끼치지 마라) 교육 덕분이다. 대참사 앞에서 보인 ‘메이와쿠’와 ‘가케루나 문화’에 우리도 놀랬고 세계도 놀랬다.
남에게 ‘폐 끼치지’말라’는 배려의 국민성은 비극 속에서도 이처럼 질서와 절제의 미(美)로 승화 한 것이다. 이 부분에서 내 자유와 권리를 주장 할 땐 남의 자유와 권리도 존중해야 한다는 그들의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다.
일본의 탄식과 절규는 전염병처럼 전파된다. 동요와 무질서, 공포와 흥분을 야기한다. 그런 이유로 슬픔을 삭이고 표출을 자제한다. 감정의 전염병을 전혀 이웃에게 옮기지 않으려는 모습이다. 그래서 세계는 이런 일본문화에 대해서 충격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일본의 저력이 아닐 수 없다. 일본인은 그렇게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저력이 마침내 일본의 국격과 이미지를 한 층 높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풍경이 우리 시민 의식을 뒤집어 보게 한다. 우리를 보자 천재지변으로 비행기 출발시간이 늦어져도 창구에 몰려와 고함을 지르며 항의하고, 준법 대신 목소리 큰 사람이 행세하고 실속을 차리고, 끼어들기 주행 밥 먹듯이 하고, 남을 탓하는 풍토, 생각할수록 마음을 부끄럽게 한다. 곧잘 극단으로 치닫는 우리네 정서와는 사뭇 달랐던 것이다.
그래도 우리 부모 세대들은 그렇지 않았다. 자기 탓, 자기책임부터 먼저 생각했고 염치를 지키려했다. 그들은 6.25전쟁 이후 한강의 기적과 국가적 풍토를 만든 세대들이다. 그러나 어느 때인가부터 남 탓하기와 떼 법의 억지와 선동의 싸구려 사회 풍토가 득세하면서 이 땅의 문화를 바꿔 놓았다.
지진과 해일, 그리고 방사능의 공포에서도 질서를 지키는 일본의 국민성. 다른 사람에게 고마운 경우에도 고맙다는 말 보다 자신을 위해 수고해서 미안하다고 “수미마센” 이라는 표현을 더 많이 할 정도로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살아있기에 일본인이 위기에서도 더욱 돋보이는 것 같다.
그런 국민정신을 가지고 있는 일본이기에 자신을 덮친 대재난을 딛고 일어서는 것은 시간문제인 것 같다. 일본 힘내라 말하고 싶다. 돌이켜보면 6.25 전쟁이라는 고난이 우리를 단단히 묶어 오늘의 우리를 만들어냈듯이 일본 역시 오늘의 고난이 그들을 더욱 더 단단히 묶어 내일의 더 큰 일본으로 만들어 줄것을 기대한다. 우리와 가장 밀접한 일본. 일본이 잘 되어야 우리도 잘된다.
우리도 한 때는 동방예의지국이란 칭송을 듣던 때가 있지 않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