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호원칼럼- 잃어버린 추억


동문기고 안호원칼럼- 잃어버린 추억

작성일 2010-09-30
‘민속적으로 해마다 일정하게 지키며 즐기는 날’ 국어사전에 나와 있는 ‘명절’의 뜻풀이다. 사전대로 생각하면 요즘 추석은 명절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에게 추석은 즐기는 날이기는 커녕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은 날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변화를 재빠르게 반영하는 것이 언론이다. 몇 해 전만해도 신문 방송은 마치 추석이 즐거워야 하는 날이라도 되는 것처럼 명절 분위기 띄우기에 앞장서곤 했다.

특히 선물 보따리를 챙겨든 귀성인파,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여 송편을 빚고 차례를 지내는 고향 풍경을 단골 메뉴로 올렸다. 그러나 올해 언론이 전하는 추석 풍경은 실질적이면서도 부정적인 측면에서 보도했다. 신문을 펼쳐보면 톱기사로 큼지막한 글씨로 ‘추석 때 가족 갈등 줄이려면’ 이라는 제목이 눈에 띠고 TV를 볼라치면 ‘명절이 아예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시민들의 말들을 곧잘 전한다.

동네 사람들이 어우러져 윷놀이 판을 벌리고 보름달을 쳐다보며 소원을 기원하고 함께 어울리는 민속 명절 한가위는 이제 풋내기 리포터의 스케치 기사에서나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귀성 전쟁이 가장 큰 이슈거리가 됐고 추석으로 인한 즐거움보다는 스트레스 따위의 조어도 전혀 낯설지 않을 정도가 됐다

누구나 그러했듯 어릴 적 내게 추석은 손꼽아 기다리는 날 중 한 날이었다. 이유는 추석빔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날씨마저도 요즘 같은 날씨가 아니라 초겨울 날씨로 서늘해서 동복을 입을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경기가 안 좋아 별로 얻어걸리는 것이 없는 해라도 양말 등 내복이라도 선물을 받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설빔, 추석빔이 이 땅에서 사라진지도 십 수 년이 훨씬 지나간 것 같다. 명절이 되어서나 그나마 아이들을 새 옷으로 단장시킬 수 있었던 ‘궁핍의 시대’ 의 습속도 이제 옷이 넘쳐나는 ‘풍요의 시대’에 밀려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 같다.

이상하리 만치 경제적 풍요가 찾아들면서 우리의 명절은 점점 그 의미를 잃어가더니 이제는 아예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어릴 때 맞이했던 추석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어느 한 쪽도 일그러지거나 부족함이 없는 둥근 달이 동녘 하늘에 뜬다. 추석에 뜨는 만월은 어머니의 그리운 얼굴이고 그 얼굴은 포근한 안식의 고향이었다.

‘삼촌 조카 잘 되라고 빌지 말고 시절 좋으라고 빌라’ 라는 속담이 있다. 세상의 형편이 좋아지면 모든 사람의 마음이 넉넉해져서 지갑을 활짝 열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이 얻어먹기에도 좋은 법이다. 추석은 평소에 잘 먹지 못하던 가난한 사람들도 넉넉하게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유일한 명절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풍성해지다보니 마음 또한 풍성해지는 추석이라 선인들조차 ‘삼백육십오일 모두 한가위만 같아라’ 하고 소망하지 않았던가!! 추석은 모든 사람들을 동화적인 세계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래서 추석날이 되면 어른들까지도 아이들같이 들뜬 마음이 되는 것이다.

추석을 앞 둔 대목장에는 사람들로 장바닥이 메어터지고 햇곡식과 과일, 색색의 옷, 재물 등을 팔고 사는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심지어는 지난 번 밀린 외상 값 갚기 위해 장을 나온 사람들도 부지기수다.

나의 추석에 대한 기억은 지금도 무지개 빛처럼 아름답고 찬란하다. 추석날 아침 일찍 추석빔으로 받은 동복을 입고 햇쌀로 빚은 송편을 먹고 차례를 지낸 후 할아버지 손을 잡고 대전에 있는 선산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 시절에는 동네마다 윷놀이와 함께 씨름대회가 열려 많은 사람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는 등 즐거운 시간을 갖기도 했다. 또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솟아오르면 고향의 바다는 은빛으로 반짝거렸고 동네 아낙네와 처녀들은 울긋불긋한 색동한복을 차려입고 마을의 가장 큰 마당에 모여 강강술래를 했다.


‘달아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노던 달아/ 저기저기 저 달 속에
계수나무 박혔으니/ 은도끼로 찍어내고 금도끼로 다듬어서/
초가삼간 집을 짓고 양친부모 모셔다가/ 천년만년 살고지고,
천년만년 살고지고‘


그런 정취의 아름다운 추석이 우리에게서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명절의 의미가 변화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폭 넓은 변화와 떼어놓고 생각 할 수가 없을 것 같다. 오늘날 사람들은 도시의 시멘트 숲에서, 시장에서, 공사판에서, 들판에서, 농장에서, 심지어는 바다에서까지 하나의 사냥꾼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몸에 내장되어있는 활력은 아픈 삶의 현장에서 흘리는 진한 땀과 더불어 닳고 닳았기 때문이다. 근대화를 통해 전통적 농경사회에서 근대적 자본주의 산업사회로 급속히 이행되면서 우리의 삶은 전면적인 구조적 변화를 겪어야만 했다.

따라서 이 같은 구조적 변화에 따라 대가족 중심의 전통적 공동체 질서가 자연스럽게 해체되었고 반비례로 도시화가 격렬하게 진전 됐다. 결국 추석 명절 찾는 고향은 개발 열기 속에서 낯선 객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고향은 하나의 성지(聖地)다. 그래서 추석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추석을 기점으로 해서 우리 민족은 여전히 대이동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올 추석에도 예외 없이 내게 들어온 선물들을 이웃에게 나눠주며 베풀 수 있음에 감사했다. 또한 개척교회 10여곳을 선정, 쌀(20kg/40kg)을 구분해서 전달을 했다. 모두가 한결같이 자기보다 더 어려운 교회에 보내라고 한다. 사실 자기들 보다 더 어려운 교회도 없는데도 말이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베풂의 아름다운 여유의 마음을 가지고 사는 그 분들이 한없이 부러웠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보면서 감사와 함께 참 기쁨을 누릴 수가 있었다. ‘더도 덜도 말고 팔월 한가위만 같아라.’ 늘 팔월 한가위 같은 날이 지속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여유를 갖고 베푸는 삶을 사는 풍요로운 세상이 되었으면 한다.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 이 칼럼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