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호원칼럼- 아바타의 인생


동문기고 안호원칼럼- 아바타의 인생

작성일 2010-07-22
며칠 전 무심코 TV를 켰는데 마침 어느 여가수가 1970년대에 인기절정이었던 ‘얼굴’ 이라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내 마음 따라 피어나던 하이얀 그 때 꿈은......” 흘러간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선율과 가사가 거침없이 내 입에서 흘러나온다.

40년 전 최루탄 연기와 데모대의 함성이 거리를 메우고 유령같은 탱크만이 텅빈 캠퍼스를 지키고 있던 시절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20대(代)에 바라보던 세상은 혼돈에 가득 차 있었고 내 앞에 놓인 수많은 인생의 갈림길이 오히려 고뇌로 다가왔지만 삶은 여전히 꿈과 낭만으로 가득 찬 날들이 더 많았기에 웃음을 잃지 않았고 마음을 송두리째 걸고 불의를 거부 할 수 있는 뜨거운 용기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 돌이켜 생각해보면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라는 가사처럼 내 삶 역시 ‘~~하려다가 ’ 내 뜻과는 다른 삶을 살면서 그대로 지나가 버린 흐름의 연속이었던 같다. 내가 이제 죽어 누군가가 내게 ‘너는 누구냐?’ 하고 묻는다면 과연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할 까. 답이 없다.

“명마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오직 앞만 보고 뛴다”고 했는데 나 역시 삶의 명마처럼 나름대로 뒤돌아보지 않고 좀 더 좋아 보이고 편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옆도 보지 않고 오직 앞만 보며 질주했고 그래서 가쁜 숨을 헐떡이며 지금 이 자리에까지 온 것 같다. 정말이지 이제 인생의 정상을 넘어 내리막길을 내려가면서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는 아직도 진짜 내가 누구인지를 자신있게 말할 수가 없다.

집에 오는 우편물을 보아도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봉투마다 인쇄된 수신자의 주소를 보면 ‘안호원 교수’ ‘박사’ ‘목사’ ‘위원’ ‘이사’ 등 타이틀이 다양하다 이 밖에도 ‘시인’ ‘수필가’ ‘칼럼니스트’ ‘상담사’ ‘웃음치료사’ ‘레크레이션 지도자’(1급) ‘스포츠 마사지사(1급)’ ‘케어복지사(1급)’ 등등의 자격증이 많이 있지만 그 어느 것도 진짜 내가 누구인지를 명확히 말해주지 못하고 있다.

내가 죽기 전에 꼭 이루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는지, 지금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조차 자신있게 대답 할 수 없을 정도로 혼미하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이제껏 60여년을 넘게 이 세상을 살아오면서 나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이 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주위에 있는 지우(知友)나 가족들이 나를 말하는 것보다 내가 누군지 더 모른다는 것이다.

무심코 그린 얼굴처럼 바람따라 흘러가다 보니 얼굴은 주름투성이고 머리는 반백의 모습으로 변했다. 세월은 그렇게 흘러갔는데도 아직 난 내가 누구인지를 자신있게 말 할 수가 없다. 동그라미 그리려다 얼굴을 그렸지만 피어나는 꿈이 있었다. 그런 꿈을 이순(耳順)이 훨씬 넘은 나이지만 아직도 그 꿈을 저버리지 않고 있는 나다.

지난 초복날 핸드폰이 울린다. 과거 신문사 재직시 함께 근무하던 후배인데 복날인데 삼계탕이나 먹자고 한다. 오랜만에 만나는 후배라 기쁜 마음으로 나갔다. 고맙기도 해서 어떻게 이렇게 어려운 시간을 다 냈냐고 했더니 하는 말이 신문사에 있을 때 신참으로 본의 아니게 일을 잘 못해 윗분에게 호된 지적을 받으면서도 항상 웃는 얼굴로 자신에게 싫은 소리 한번 안하고 오히려 위로의 말을 해준 선배의 고마움을 두고두고 잊을 수가 없었는데 오늘 시간을 내서 찾아뵙고 그 때의 감사함을 전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당시 팀장으로 그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인데 후배는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으니 감사한 마음뿐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후배가 말하는 것을 듣고도 나는 그 때의 일이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아 솔직히 멋쩍기도 했다. 그러나 그 후배가 없었던 일을 갖고 소설을 쓸리는 없을 테고 아무튼 그의 웃고 떠드는 소리를 들으며 삼계탕을 맛있게 먹었다.

그 후배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자상하고 늘 베푸는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나와 30여년을 함께 한 아내는 내가 아주 잔인하고 무서운 사람이라고 한다. 그래서 정작 나는 어떤 게 진짜 나인지를 모르겠다.

그 후배와 헤어져 돌아오면서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이렇게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일에 고마움을 느끼고 감사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반대로 내가 기억을 하지 못하는 일에 상처를 받고 원망을 하는 사람도 있지 않겠는가 하는 거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어서 그 후배처럼 어느 날 불쑥 나를 찾아와 아무 날(日), 아무 시(時)에 당신이 내게 이러이러한 잘못을 저질렀다 그래서 두고 두고 씹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이렇게 찾아왔노라 한다면 그 때는 어떻게 처신을 해야 좋을까. 만약 그렇게 된다면 감사함을 느끼며 찾아왔을 때처럼 기억은 나지 않아도 순순히 내 잘못을 인정하면 어찌 될까?

기억 할 수는 없지만 그 역시 없었던 일을 갖고 요즘 같이 살기 힘든 세상에 따지러 왔을 리는 없을 테니 무조건 사과를 한다면 상대방의 응어리진 마음이 쉽게 풀리지는 않을까. 비록 나는 기억을 할 수 없더라도 상대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면 분명 그것은 나의 잘못으로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따라서 불교에서 말하듯 좋은 경계가 오면 감사한 일이구나 하고 마음을 내려놓고, 또 나쁜 경계가 오면 마음으로 돌려서 잘 되라고 놓아야 한다. 이렇듯 일체 경계가 내 탓인 줄 안다면 억울해 할 일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얼굴을 붉힐 일도, 목소리를 높일 일도 없다. 모두를 감사하게 받아드리면 되는 거다.

좋은 것이라고 붙잡고 싫은 것이라고 떨쳐내려는 마음으로는 세상을 제대로 살 수 없다. 그 붙잡고 떨쳐내려는 마음이 바로 선악의 인연을 짓기 때문이다. 토마스 머턴이라는 신학자는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는 길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의 참된 기쁨은 ‘자기’ 라는 감옥에서 빠져나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창살 없는 그 감옥에 나를 가둬두고 온갖 타이틀만 더덕더덕 몸에 붙인 채 또 다른 나로부터 지시를 받으면서 아직도 내가 누구인지를 모른 채 하루를 맞이하며 노을지는 하루를 따라가고 있다. 내 삶을 내 의지대로 살지 못한 것 같다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 이 칼럼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