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호원칼럼-17%의 슬픔에 빠진 나


동문기고 안호원칼럼-17%의 슬픔에 빠진 나

작성일 2010-05-06
꽃은 만개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초록색은 본색을 아직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대지를 서서히 물들이며 간다. 잔인한 달이라는 4월이 우리 마음에 꽃씨를 뿌리고 초록의 붓질로 밑그림을 그리면서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났다. 그래서인가 4월이 남기고 간 진달래 핏빛이 오늘 따라 더욱 더 선명해 보이며 필자를 더욱 더 슬픈 마음을 갖게 하는 것 같다.

한동안 법정스님의 무소유 신드롬으로 속(俗)세인들의 가슴을 흔들어 놓았지만 망각의 동물인 우리이기에 언제 그런 때가 있었나 하는 식으로 기억에서 지워졌다. 물론 무소유의 환상과 가치를 인정한다. 그 이유는 어떤 사람이든 소유와 집착의 노예가 될 때 불행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집고 넘어 갈 것은 도피적 무소유나 감성적 무소유는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에 것에 대한 소유와 집착이 싫다고 해서 우리 모두가 바지, 저고리 하나만 입고 산으로 들어가 버린다면 이 세상은 과연 어떻게 되겠는가.

법정스님은 독신으로 고행을 하는 스님이기에 가능할지 몰라도 속세인은 최소한의 것은 소유할 수밖에 없다. 결혼을 하면 가족이 생기고 거처할 집도 마련하고 학자금도 마련해야 한다. 정말 중요한 것은 무소유, 소유가 아니다. 아무리 청산에 들어가 혼자 고고한 무소유적 삶을 살며 행복을 누렸다해도 인간은 어차피 죽게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솔로몬처럼 세상의 모든 부와 명예와 권력을 소유한 사람도 결국은 죽음 앞에서 몸뚱이조차 소유하지 못하고 남겨놓고 떠난다. 그렇게 모든 것을 가졌던 솔로몬도 떠나면서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고 고백한다.

일제 시대에 효봉 스님은 원래 유명한 판사였는데 자신의 판단 실수로 무고한 한 생명을 잃게 함으로서 양심의 가책과 죄책감에 빠져 법복을 벗고 전국을 다니면서 엿 장사를 하다 끝내는 속세를 떠나 승려가 된 아주 훌륭한 분이다.

승려가 된 후 평생을 무소유의 삶을 살며 당대 최고의 승려로 추앙 받았지만 그 역시 마지막 떠날 때는 ‘모든 것이 무(無)다. 모든 것이 무야’ 라는 말을 남겼다. 결국 소유의 삶을 살았거나 무소유의 삶을 살았거나 인생은 죽음 앞에 이르러서는 모든 게 다 허무할 뿐이고 죽음으로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행복은 재물이나 명예나 권세를 얻을 때 얻어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하나라도 더 소유하고자 안간힘을 쓰고 몸부림을 친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다. 진정한 행복은 소유한 것을 나누고 쓸 때 느끼는 것이다. 물론 돈을 벌 때도 행복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돈을 벌어서 모으기만 하지 평생 쓸 줄을 모른다면 돈을 버는 기쁨을 느낄 수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돈을 벌 때 행복한 마음이 되는 게 아니라 돈을 쓸 때 행복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혼자 쓸 때보다 여러 사람과 함께 나눠 쓸 때 더 행복함을 만끽할 수 있다. 그래서 자신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돈을 버는 것보다 쓰는데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나 자신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라도 이웃에게 먼저 관심을 가지고 섬기며 사랑해야 한다.

만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이런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길은 없다.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부유해지고 남에게 마실 물을 주면 자신도 갈증을 면한다”고 성경은 말한다. 지상 생애의 여정에서 부(富)는 피해 갈 수 없는 삶의 갈망이다. 부유는 인생의 많은 불편함을 덜어주고 우리의 자존감을 높여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많은 부를 소유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으로 세상은 오늘도 숨가쁜 죽음의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이제 부는 구체적으로 생존의 동기요, 목적이 되어버렸다.

나 역시 무소유의 행복을 인정하는 사람이지만 무소유만 행복하다는 것은 아니다. 소유를 통한 행복도 있을 수 있다. 자신의 땀과 열정으로 합법적인 부(富)를 소유하여 어려운 이웃을 위해 선(善) 한 일을 한다면 그것은 더 실질적인 무소유이며 삶의 행복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선하게 산다는 것은 바로 타인의 삶을 도우며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는 것이다.

이처럼 타인의 삶을 도우라고 하는 데는 다 그만한 까닭이 있다. 그런 삶의 자세가 바로 자신을 살리는 길이기 때문이다. 남을 돕고자 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적어도 한 줄기 빛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나보다도 먼저 남을 생각하는 고운 마음 씀씀이다. 이런 고운 마음에서는 아름다운 향내가 풍겨나는 것이다.

우리의 베풂은 부의 역동적 선(先)순환을 제공한다. 베푼 자들에게 유익은 다시 돌아오기 때문이다. 비록 그 돌아옴이 물질 자체가 아니더라도 베푼 자의 마음에 깃드는 정신적인 여유로움과 영적인 상쾌함은 물질로 환산 할 수 없는 축복이다. 이런 베푼 자의 행복감은 그의 삶의 공간을 은혜가 넘치는 정원이 되게 한다.

또한 고난이 있기에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적당한 슬픔은 그래서 필요한 것이다.

과학자들이 분석한 자료를 보면 우리 마음엔 83%의 행복감과 17%의 슬픔이 조화롭게 담겨져 있다고 한다. 100% 행복감이 주어진다면 그것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수치가 아니란다. 적당한 슬픔이 있기에 83%의 미소가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모나리자의 미소에 100% 행복감이 있었다면 그녀는 그저 한 여인으로서 평범한 초상화의 주인공으로 전락하고 말았을 것이다. 적당한 고난이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누구나 바라는 그 행복은 과연 어디에서 찾는 걸까. 그 행복은 내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행복은 내 자신이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래서 그 마음에서 행복도 만들어지고 불행도 만들어지는 것이다. 순간순간 내가 지닌 생각대로 가는 것이다. 이것이 업(카르마)의 흐름이요 그 법칙이다.

보이지 않는 행운의 네 잎 크로바를 찾아 헤매는 우리가 아니라 눈앞에 보이는 행복의 세 잎 크로바를 먼저 찾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오늘 하루만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들만 생각하고 내가 베풀 수 있는 친절과 사랑만 생각하자. 그래서 사랑의 꽃 오월의 붉은 장미가 활짝 피는 5월을 맞이하자.

성경은 어리석은 부자에게 “재물을 많이 쌓아 놓고 내 영혼아 평안 하라 하지만 네 생명이 끊어지면 그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그러므로 삶의 풍성함이 재물의 넉넉함에 있지 아니하다” 고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들이 행복해지려면 “재물이나 권력과 명예를 언제 어디에 쓸 것인가?” 하는 비전과 꿈을 먼저 세워야 된다.

행복은 소유할 때 얻어지는 게 아니라 쓰고 나눌 때 얻어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직도 탐욕을 버리지 못한 채 무력한 마음, 남을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위선자가 되어 17%의 슬픔에 빠져 있다.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 이 칼럼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