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호원칼럼- 거울에 비친 업


동문기고 안호원칼럼- 거울에 비친 업

작성일 2010-04-01
지금은 이미 시간과 공간마저 모두 놓아버린 법정스님. 그 스님이 세속 78세에 입적한 지도 어언 보름 남짓 지났지만 아직도 그 분의 흔적이 우리 곁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그동안 스님에 관한 보도와 기사를 지켜보면서 참으로 많은 것을 깨닫게 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종교를 떠나 오욕칠정에 사로 잡혀 살아온 범인(凡人)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상의 모습을 통해 반성과 회의감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다. 조금이라도 더 갖고 싶어 했고 조금이라도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 싶었고 또 쥐꼬리만 한 명예라도 더 얻기 위해 그동안 얼마나 안달을 하며 추함을 보이면서 살아왔던가를 생각하면 부끄러움과 함께 자괴감에 빠질 수밖에 없다.

특히 서울 성북동의 요정을 시주 받은 후, 그곳에 사찰을 창건하고도 그곳에 머물지 않고 강원도 산골 화전민이 살던 오두막을 빌려 홀로 땔감을 구하고 밭은 손수 일구며 살아온 참 수행자이신 법정 스님.

그 분은 글을 쓴 대로, 말을 한 대로 삶과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대로 몸소 실행에 옮겼던 분으로서 청빈의 도와 맑고 향기로운 삶을 실천하고 30년 넘게 침묵과 무소유의 정신으로 살아왔다.

버리거나 남에게 주워버릴수록 얽매임에서 풀려나고 더 많이 지니고 쌓아놓을 수록 옥죄여 살아간다는 노스님의 말씀이 왜 이리 구구 절절히 가슴에 와 닿는 것일까.

더구나 자유의 몸이면서도 스스로 유배 사리를 선택해 깊은 산 속에서 수행을 하며 많은 글을 쓰고 책을 펴내면서 많은 독자를 확보했던 스님이 더 이상 이 세상에 자신의 흔적을 남겨두지 않겠다며 마지막 유훈으로 모든 책의 절판을 권고했다는 사실에 더욱 마음이 숙연해지게 만드는 것 같다. 똑같은 사람인데 어떻게 이렇게 달라진 삶을 살며 똑같은 수행자인데 어떻게 서로 다른 삶을 살 수 있을까.

최근 물의를 빚고 있는 조계종의 분쟁을 보면서 느끼는 감정이다. 이를 보면서 성대중의 말을 떠올린다. “겸손하고 공손한 사람이 자신을 굽히는 것이 자기에게 무슨 손해가 되겠는가?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니 이보다 더 큰 이익이 없다. 교만한 사람이 포악하게 구는 것이 자기에게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사람들이 미워하니 이 보다 큰 손해가 없다.” 또 있다. “남에게 뻣뻣이 굴면서 남에게는 공손 하라 하고 남에게 야박하게 하면서 남 보고는 두터이 하라고 한다. 천하에 이런 이치는 없다. 이를 강요하면 반드시 화(禍)가 이른다.”

그리고 “나를 찍는 도끼는 다른 것이 아니다. 바로 내가 다른 사람을 찍었던 도끼다. 나를 치는 몽둥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남을 때리던 몽둥이다. 잠깐 사이에 도리어 내가 마치 스스로 포박하고 나아가는 형국이 되면 지혜도, 용기도, 아무짝에 쓸데가 없다”

또한 그는 “청렴하되 각박하지 않고 화합하되 휩쓸리지 않는다. 엄격하되 잔인하지 않고 너그럽되 느슨하지 않는다.” 많은 종교인들이 모두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내용이다.

어떤 사람이 저녁나절 약간 시간이 지난 돼지고기 찌개를 먹었다. 맛이 간 음식이라 약간은 꺼림직 했지만 괜찮겠지 하는 마음과 버리기는 아깝다는 생각에서 먹었다. 그런데 얼마 후 속이 메슥거리고 식은땀이 나자 순간적으로 식중독이라는 생각을 하니 심장박동마저 빨라지고 토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병원을 가려고 했더니 마침 공휴일이라 약국마저도 갈 수가 없었다. 별수 없이 마음을 달래며 있다 보니 더 이상 진전된 증상도 보이지 않고 울렁거림도 없어지고 하얗게 질렸던 얼굴도 형색이 붉어지고 아팠던 증세도 없어졌다.

이 모든 증상들이 바로 인간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무의식들이 벌린 사태였다. ‘상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일말의 염려가 내 의식 깊은 곳에 과거의 경험으로 저장되어 있던 식중독의 증상을 끄집어 내면서 고통스러운 증세를 나타나게 한 것이다. 그래서 그 두려움들은 심지어는 몸의 증상까지도 그대로 수반하게 된다.

그런데 그것을 과거의 경험이나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에 의지하지 않고 현 상황만을 정확하게 바라봤을 때 자신이 느끼지 못할 정도로 연기와 같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우리들은 이런 무의식적인 자세에 속아 가면서 두려움에 빠진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두려움은 진짜가 아니다. 고통도 슬픔도 모두 진짜가 아니다. 마치 반야심경에 나오는 ‘뒤 바뀐 헛된 꿈같은 생각’인 것이다.

깨칠 때까지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수년간 바깥출입을 금한 채 용맹정진 하는 스님들이 많다. 대승 불교의 자비 정신은 진정 자기의 근본 부처자리를 알고자 함에 자기의 본래 면목을 부처와 중생, 세간과 출세간, 열반과 생사의 차별이 모두 사라지고 보살의 이타(利他)행으로서 모두를 이익 되게 하는 것.

이 같은 수행을 통해 얻어지는 공덕을 한 개인이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닌 모든 중생을 건지기 위해서 쓰여지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 같다. 이 모든 생각과 의식과 관념을 관장하는 자기 뿌리가 누구에게나 있다. 이는 자기를 이끄는 근본 불성(佛性)을 말하는 것이다.

그 뿌리에 대한 진정한 믿음이 있다면 두려움도 용기로 바꿀 수 있고 잘못 속에서도 배움을 찾음으로써 참 지혜로 살아갈 수 있다. 업이라는 것은 그 업을 지은 개인이 온전히 다 받을 수밖에 없는 옴짝달싹 할 수 없는 법칙이 아닌가.

30만의 신도, 연간 시주액이 100억원이 넘는 사찰 직영. 아무래도 과욕이 화를 부르는 것 같다. 모두를 비우면 되지만 스님들이라도 그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닌가보다. 육신조차 버리고 떠난 법정스님에게 부끄러움을 느낀다.

“이름은 뒷날을 기다리고 이익은 남에게 미룬다. 세상을 살아감은 나그네처럼, 벼슬에 있는 것은 손님처럼” 사람이 그만큼 답을 몰라서가 아니라 언제나 자신이 행할 것을 잊으니 그게 탈이다. 누구에게나 이름은 불려질 수 있지만 누구나 그 이름을 빛나게 할 수는 없다.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 이 칼럼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