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호원칼럼-마음까지도 비워야 참 만남


동문기고 안호원칼럼-마음까지도 비워야 참 만남

작성일 2010-03-19
           
새로운 봄이 시작되려는 것을 시샘이라도 하듯 갑작스레 닥친 꽃샘추위로 몸과 마음을 움츠러들게 한다. 이런 날씨를 접하면서 우리 인생의 사계절을 돌이켜보는 시간을 갖게 되는 것 같다.

때아닌 춘설이 내려 눈발 날리는 바깥 풍경을 바라보니 낙엽이 힘없이 떨어진다. 그 낙엽을 보면서 불현듯 떠오르는 게 있었다. 만남이었다. 문득 나는 오늘 하루 소중한 시간에 누구를 만나고 또 누군가에게 무엇이 되었는가를 생각해보게 된다.

너나 할 것 없이 우리는 끊임없이 ‘어떤 것’ 혹은 ‘누군가’와 늘 만나게 된다. 또한 그 같은 만남을 통해 선택을 하게 되고 가벼운 것이든 진지한 것이든 그 대상과 관계를 맺게 된다. 인생이란 결국 만남과 관계의 연속이다. 그런 관계속에서 어떤 만남으로 이루어지느냐에 따라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로 갈라진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누구를 만나느냐에 운명이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간혹 버스나 전철, 심지어는 길거리에서 끊임없이 누군가와 문자로 혹은 핸드폰으로 대화를 나누는 ‘혼자’이면서도 ‘혼자가 아닌’ 사람들을 많이 보게된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역시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고 더불어 살 수 밖에 없는 자연의 동물이란 것을 생각게 한다.

그래서 아침에 눈을 뜨면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우리는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누군가를 끊임없이 만나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가 보다. 그만큼 일상의 만남이 우리에는 매우 중요하다. 그런 연유에서일까. 우리는 좋은 스승과 친구를 만나기를 원하고 좋은 직장 동료, 상사를 원하고 생을 함께 할 배우자도 좋은 만남의 대상이 되기를 희망하고 바란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좋은 만남의 주인공이 되려는 데는 참으로 인색하기만 하다. 한평생 살아가면서 좋은 만남을 경험한다는 것은 오복 중의 하나로서 행복이다. 그만큼 좋은 만남은 한 사람의 운명을 행복으로 바꾸어 놓기도 한다.

‘삼중고(三重苦)의 성녀’라 불리는 헬렌 켈러는 7세때 설리번 선생님과의 만남으로 운명이 바뀌면서 ‘빛의 세계’로의 새로운 역사가 이루어졌다. 설리번 또한 헬렌 캘러라는 제자를 만남으로 인해 훗날 많은 사람들에게 위대한 멘토이자 스승으로 추앙을 받게 된 것이 아닐까.

이렇게 좋은 만남, 복된 만남이 우리 생에 늘 풍성했으면 좋겠지만 거저 얻어지는 것도 아니고 모두가 좋은 만남으로 이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좋은 만남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나 자신이 좋은 사람으로서의 만남이 되어야 한다. 물론 그런 만남에 있어 조건을 붙일 수는 없겠지만 보다 풍성한 만남, 좋은 만남을 위한 노력은 바로 나 자신의 몫일 뿐이다.

부처의 길을 따르는 사람은 두 가지를 버리고 두 가지를 소유해야 한다고 한다. 버려야 할 두 가지는 ‘탐욕’과 ‘무지’다. 그리고 소유해야 할 두 가지는 ‘무아’ 와 ‘무소유’ 다. 여기서 말하는 무소유는 아무것도 소요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불필요한 것에서 자신이 얼마나 자유로워지는 가를 살피는 것이란다. 아울러 진정한 겸손과 사랑이 없는 무소유는 공허할 뿐이다. 그런 무소유의 저자인 법정스님이 지난 11일 속세를 떠나 입적을 하셨다.

56년 전 효봉스님을 만나면서 출가를 결심하게 된 법정스님. 가엾은 중생들에게 늘 ‘아쉬운 듯 모자라게 살아라. 더운 때는 내가 더위가 되는 게 순리다’라고 한 오래 전 설법이 왠지 모르게 가슴에 와 닿는다.

육체는 무소유였지만 그의 정신은 인간에 대한 뜨거움의 갈구였다. 그는 동족상잔의 비극 속에서 인간과 존재라는 물음에 직면했었고 급기야는 스물 네 살 때 싸락눈이 내리던 어느 날 자유인이 되고 싶은 심정으로 무작정 집을 나왔다.

그런 법정스님이기에 타 종교인들과의 만남도 좋은 관계로서의 만남이었다. 종교를 초월한 좋은 관계의 만남이 이루어지다 보니 그의 법회에는 김수환 추기경이, 추기경의 미사엔 그가 찾았다. 그래서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수녀들과도 교분이 두터웠다.

그런 만남의 관계에도 불구하고 이제 버리고 떠나기를 강조해왔던 그가 육신마저 남겨놓고 떠난 속세는 여전히 소유욕으로 어지럽고 아귀다툼으로 고통스러운 삶을 살며 아픔을 호소한다. 세상을 보면 학력, 재물, 권력, 명예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양극화로 보수, 진보의 이념차이로 꽉 막혀 있다.

교회 십자가는 날로 늘어나며 대형화되고 사찰에서는 법고(法鼓)가 둥~두둥둥 끝없이 이어지는 네 박자의 울림에도 여전히 잡음이 많고 시끄럽기만 하니 어찌하면 좋은가. 좋은 만남도 나쁜 만남도 언젠가는 비우게 되는 날이 있다. 한 밤중 소나기가 잠든 숲을 깨우며 스쳐지나가듯 그렇게 짧다. 그럼에도 우리가 하나라도 더 챙겨야 직성이 풀리는 탐욕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

언제인가는 누구든 양손을 펴고 떠나갈 세상이다. 좋은 만남은 늘 오늘 같은 마음으로 소중하게 여기며 아름다운 시간을 가져야 한다. 이제 무소유의 저자 법정스님이 모든 육신의 무거운 짐을 벗어 던지고 완전한 무소유자가 되어 새로운 만남을 위한 자유인이 되고자 그토록 살아생전 꿈꾸시던 정토의 길을 떠났다. 그래서 법정스님과의 만남은 없었지만 법정의 무소유와 소통이 못내 그리워지는지 모르겠다.

김수환 추기경에 이어 법정 스님도 살아 생전에는 볼 수 없는 먼 길을 떠났다. 그 분들을 통해 덜렁 세상에 남은 우리가 더 아름답게 사랑하고 베풀며 사는 삶을 배웠으면 한다. 그리고 언젠가는 맞이해야 할 이별을 생각지 못하는 우리에게 좋은 만남을 이루면서 그 이별의 아픔까지도 체험하게 하여 이 사회가 밝은 세상이 되었으면 한다.

밝은 세상이 되기 위해서는 좋은 만남이 필요하다. 우리의 만남이 우연처럼 보였어도 먼 훗날 되돌아보면 필연이라 말 할 수밖에 없는 무수한 만남속에서 좋은 만남이 있기를 날마다 소망하며 기도해야 한다. 또한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어주기 위해 오늘 하루의 만남에 관계를 즐거워하고 또 사랑해야만 한다. 그리고 좋은 만남의 관계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욕심을 버리고 마음까지도 비워야 한다.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 이 칼럼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