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기고
안호원 칼럼-나를 온전히 비운다는 것은...
“나를 온전히 비운다는 것은”
2010년 03월 11일 (목) 10:55:58 안호원
창 밖에 있는 나뭇가지에 하루 종일 매달려있던 눈덩어리가 바람에 힘없이 철퍼덕 소리를 내며 땅으로 떨어진다. 전혀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떨어진 것이다. 그 현상에서 문득 ‘청산은 날 보고’라는 시조의 글귀가 떠오른다.
“청산 나 보고 말없이 살라하며/창공 나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사랑도, 미움도 모두 벗어놓고/물 같이, 바람같이 살다 가라하네.”
어찌 보면 우리네 삶도 바람 따라 흐르는 구름과 같이 힘없이 이리저리 밀려가다 때로는 비가 되어, 혹은 눈송이가 되어 이 세상을 촉촉이 적시며 다시 구름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는 것 같다. 그러나 그 구름은 어제의 구름은 아니다.
요즘 가끔은 석양빛을 받으며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며 다짐해 보는 건 미움과 욕심 벗어 던지고 물 같은 마음으로 남은 생(生)을 살아보겠다고 생각해보지만 언제나 내게 돌아오는 것은 아직도 내게 남아있는 ‘오만함’을 버리지 않고는 물과 바람 같이 살다갈 수 없다는 대답뿐이다.
불교에 입문하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내가 곧 부처가 된 것임을 아는 것이라고 한다. 이는 내 주장자를 발견하는 것이라 말 할 수 있는데 불가에서 말하는 내 주장자를 발견하기 위한 수행의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은 ‘내려놓는 마음’이다.
일명 방하착(放下着)이라고도 하는 이 내려놓음은 바로 ‘내 것이다’ ‘내가 옳다’ ‘나다’ 하는 ‘나(自我) 가 존재함으로 인해 벌어지는 모든 집착과 애욕의 마음들을 내려놓으라는 것이지, 모든 걸 내려놓고 아무것도 없이 멍하니 살라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몸은 부지런하게 최선을 다해 움직이되 그 마음에 붙이는 곁가지가 없는 ‘내려놓음’이 되어야 진정한 지혜를 샘솟게 하는 것이란다. 그래서 특히 불자(佛者)들이 그 좋은 것을 내려놓기 위해 염불 수행을 하기도 하고 절(사찰) 수행을 하기도 하는 것이다.
결국 내려놓음이란 것은 나를 온전히 비운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모든 것을 버린다는 말은 허구 일수도 있다. 왜냐면 생명이 함께 하는 한 보통사람으로서는 마음으로든 물욕에 있던 인간이 갖는 본능적인 욕심과 욕망을 모두 내려놓는다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기 때문이다. ‘나보고 말없이 살라 하며 물 같이, 바람같이 살다가라 하네.’
언제나 혼자인 것 같지만 늘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그런 세상을 살다보면 좋은 소리보다 나쁜 소리를, 즐거운 이야기보다 괴로운 이야기를 더 많이 들으며 살게 된다. 그런 때마다 누군가에 대한 미움과 분노, 원망, 섭섭함에 밤잠을 설치며 괴로워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럴 때마다 그 대상을 생각지 말고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간의 여유를 가져보아야 한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대상이 미워지고 원망스러운 것 또한 원인제공자가 바로 ‘나’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미움의 분노가 사그라질 것이다.
최근 같은 지역에 있는 여자 문인 한 분이 포털 사이트에 내 실명까지 거론해가며 나에 대한 악글을 올린 것을 우연히 보게 됐다. 다행히 포탈 사이트는 삭제요청을 해서 삭제되었지만 정작 당사자는 사과해야 한다는 주위 분들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내가 숨겨 놓은 글인데 어떻게 알았을까?’라며 그 행위가 얼마나 사회에 영향을 끼치며 무서운지를 모르는 것 같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명예훼손으로 법적처리를 하고 싶었지만 자신의 행위가 잘못 된지도 모르고 있는 그 여자문인이 노망 끼가 있을 것 같은 측은지심으로 조건 없는 용서를 하기로 했다. 지각과 상식이 있는 분이라면 그렇게 할 수도 없다는 것이 첫째 이유다.
또 하나의 이유는 삶이란 역설적으로 나를 사랑하는 이들을 통해서 만이 아니라 나를 미워하는 이들을 통해 더 깊은 깨달음을 얻고 내 얕은 마음을 살펴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심기가 불편했지만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느낌이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이웃 사랑과 하나님 사랑을 말씀 하셨지만 인간적인 측면에서는 다소 해석의 차이가 있다고 본다. 우선 하나님은 믿음의 대상으로서의 사랑이지만 사람의 경우는 믿음의 대상이 아닌 사랑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 될 수는 있어도 믿음의 대상일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들 대부분이 실망하거나 미워하게 되는 원인이 바로 사랑의 대상을 믿음의 대상으로 잘못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 같다.
믿지 말아야 할 것을 믿고 기대하지 말아야 할 것을 기대했던 어리석음이 혹독한 대가를 지불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인간관계에서 오는 고통인지도 모른다. 사랑받는 것을 기대하다 결국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는 말이 그래서 더 마음 깊이 다가오는지 모르겠다.
노자 역시 ‘청산은 날 보고 살라’처럼 인생을 살아가는데 최선의 방법은 물 같이 살라는 것이었다. 즉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겸손하고 부드러운 표정으로 흐르는 물의 진리를 배우라는 것이다.
그런 물은 어느 상황에서나 본질은 변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것에 순응한다. 그러면서도 평소에는 생물을 키우고 한편으로는 꽃잎의 갈증을 해소시키면서도 유사시 한 번 포효하면 바위를 깨부수고 거대한 산을 무너뜨리는 무서운 힘을 갖고 있다.
그 같은 물이 우리에게 주는 또 하나의 교훈은 물은 항상 낮은 곳으로 흐르며 겸손하다는 것이다. 그런 물이지만 물은 아무 맛을 내지도 않는 맹물이라는 것이 특징이기도 하다. 그런 무미(無味)한 맹물이기에 우리는 질리지도 않고 날마다 먹어도 좋다. 그런 맹물 같은 삶을 살고 싶다. 언제나 누구에게도 싫증나지 않는 사람이 될 수는 없을까?
이제는 이순(耳順)을 넘어선 나이, 물 같이, 바람같이 흘러가는 세월 따라 기력이 쇠퇴해지는 만큼 내 마음도 맹물과 같이 맛은 없지만 모나지 않고 유연하게 다양한 사람을 너그럽게 포용하고 육신의 욕심까지도 모두 내려놓고 비워지는 마음이 되었으면 한다.
결국 인간은 조금씩, 조금씩 마음을 비우고 비우다, 아무것도 갖지 못한 채 속세를 떠나게 되는데 이런 삶이 하늘의 뜻인 것 같다. 남을 속이기는 쉽지만 자신을 속일 수는 없다. 이제 오늘이 어제로 지나가는 시간. 나를 행복하게 해 준 것만 간직하고 슬픔과 상처의 아픔은 모두 지워버리며 나 자신을 위한 욕심은 어둠에 묻어 생각지도 말자.
그리고 새벽의 어둠을 거두고 곧 밝은 빛으로 찾아들 또 다른 오늘을 기다리는 우리가 되자. 그래서 하얀 도화지와 같은 여백의 오늘, 새로운 그림을 그리듯 크레파스로 내 희망을 그려보는 너그러움을 가져보자.
나를 온전히 비운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안다. 그런 마음에서일까. 오늘이라는 새 날의 빛이 밝아오기까지 펜을 놓지 못하고 잠 못 이룬 채 뒤척이며 가슴속 깊이 배여 나는 아픔을 삭이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 이 칼럼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