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호원칼럼- 작은자에 대한 관심과 사랑


동문기고 안호원칼럼- 작은자에 대한 관심과 사랑

작성일 2010-02-27
새벽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이번 주 칼럼은 어떤 주제로 쓸까 생각해보았다. 문득 요즘 가쉽거리가 되고 있는 전ㆍ현직 교장들의 금품수수로 인해 곤욕을 치루며 십 수 년 쌓아온 명예를 더럽힌 것이 생각났다.

정치인은 그렇다 친다 해도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육자들까지 그러니 한심한 생각이 든다. 이는 모두가 탐욕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늘을 사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big’이라는 상징을 추구하는 일에 정신이 빠져 이 세상을 살고 있다. 큰 건물, 큰 집, 많은 재물, 비싼 차, 좋은 학벌, 아름답고 건장한 외모. 더 더욱 정신을 빼앗기는 것은 이 같은 ‘큰 것’을 성취한 사람에게 부러운 눈초리다.

그래서 잃을 수도 있는 이 큰 것을 얻기 위해 자신의 인격, 도덕, 양심마저도 던져버리는 힘의 논리가 어이없게도 설치고 있다. 마치 한 순간의 행운을 차지하기 위해 수많은 행복을 버리듯 한다.

네 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운이다. 그러다 보니 행복을 뜻하는 수많은 세 잎 클로버들을 무참하게 짓밟고 다니며 불행을 자초하는 어리석음의 삶을 살고 있다. 우리의 삶은 바닷가에 쌓여있는 모래성에 불과하다. 흐르는 물(水)에 휩쓸려 밀려가는 모래알 같은 인생이다. 작은 행운을 위해 더 큰 행복을 잃고 있다.

오늘날 이러한 세상 속에서 기독교 불교 등 종교계조차 이 세상 기업처럼 ‘큰 것’만을 추구하다보니 정작 세상으로부터 존경과 권위를 잃고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한 모습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지탄을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모두가 탐욕 때문이다. 제사보다는 제상에 차려진 음식이 더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다.

핸리 밴이 쓴 ‘대저택’ 이라는 작품 속에 의미심장한 글이 있다. 내용은 어떤 부자가 죽어서 하늘나라로 갔다. 전입신고를 한 후 배당 받은 자기 집으로 갔더니 천장도 제대로 없는, 비가 오면 비가 샐 것 같은 아주 초라한 오두막집이었다. 이런 집을 본 부자는 왜 내게 이런 집을 주느냐고 불평을 했다.

문득 으리으리한 저택을 보게 되었는데 그 저택의 주인은 바로 자기(부자) 옆집에 살던 가난한 의사였다. 분한 마음으로 부자는 그 즉시 하나님에게 달려가 항의를 했다. 그랬더니 옆에 있던 천사가 “이 모든 건축자재는 당신이 세상 살 동안 보내온 것들입니다. 저 의사는 마을 사람들의 질병을 무료로 고쳐주며 평생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 삶을 살았습니다.

결국 땅에서 쌓은 선행들이 모두 하늘나라로 배달이 되어 그런 저택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부자)의 선행은 오두막집의 지붕을 씌우기 조차 부족할 정도입니다. 당신은 결국 당신만을 위해서만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난했던 저 의사는 평생토록 남에게 사랑을 베풀며 세상을 살아왔습니다. 그(의사)가 세상에서 베푼 사랑은 천국에서 대저택을 몇 개를 짓고도 남을 만큼의 분량이 됩니다.”

순간의 욕심을 채우려다 영원한 축복을 빼앗긴 것이다. 이 세상은 사랑을 줄 수 없을 만큼 빈자도 없고 사랑을 받지 않아도 될 만큼 풍족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서로에게 기대는 것이 아니라 기댈 곳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이 세상은 우리의 생각과 행위가 만들어낸 결과이다. 그래서 우리 마음속에 천당도 만들기도 하고 지옥도 만들어지는 것이다. 사람은 순간순간 자신이 지닌 생각대로 이루어진다. 이것이 바로 불교에 말하는 업(業: 카르마)의 흐름이요, 자연의 법칙이다. 모든 인간은 서로가 조각으로 떨어져나간 섬(島)이 아니라 바다 밑으로 이어진 대륙의 한 부분이다.

인간으로서 세상 부귀영화를 누리며 부러울 것 없던 솔로몬도 죽음을 앞에 두고 모두가 헛되고 헛되다고 고백했고 예수를 핍박하던 사도 바울도 참 진리가 무엇인가 깨닫고 그가 누렸던 세상적 지위와 지식, 그리고 가문의 명예와 부귀를 분토같이 여기며 배설물 같이 미련 없이 버렸다.

그를 그렇게 변화시킨 주인공인 예수님은 육신적으로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이 땅에 인간으로 오셨지만 죽기까지 복종하시며 가난한 자들을 위해 생명을 잃은 것 같이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3일 만에 부활시켜 온 인류의 구주로 높이 되시게 하셨다.

지금은 사순절 기간이다. 그래서 기독교와 천주교에서는 사십일 이후 돌아오실 부활절 기념을 위해 기도의 시간을 갖고 있다. 그런데도 여전히 이 세상이 밝아지고 있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꼼꼼히 생각해보지만 자책의 마음뿐이다.

세상의 바쁜 발걸음 속에 오늘도 어김없이 아침해가 떠오르며 창 밖 소음 소리에 살아있다는 마음에 감사를 드린다. 우리의 삶은 풀잎에 내려앉은 아침 이슬과 같은 삶이다. 그 짧은 삶 속에서 아직도 우리 주위에는 나눠야 할 ‘슬픔’이, 치유해야 할 ‘아픔’이, 나눠줘야 할 ‘빈 손’들이, 해방시켜야 할 ‘눌림’과 ‘묶임’들이, 채워줘야 할 ‘궁핍’과 ‘소외’가 너무도 많음을 보고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자신들의 욕망은 채우려고 안달을 하면서도 이 세상 떠날 때 모두 버리고 갈 재물은 이웃을 위해 베풀고 나눔에는 인색하기만 하다. 지나친 탐욕으로 이제껏 쌓아온 공덕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며 불행해지는 결과를 우리는 간접적으로 체험하지 않는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삶을 조금이라도 닮은 삶을 살았으면 한다.

그래서 사순절 기간을 통해 지극히 작은 자에 대한 관심과 베푸는 사랑으로 ‘네가 살아야 나도 산다.’는 상생(相生)의 마음이 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한다. 누구든 인생을 결산(죽음)하는 날이 반드시 온다. 그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상급의 주인공으로 인정받는 생애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 이 칼럼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