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기고
안호원 칼럼- 방기곡경
방기곡경 芳岐曲經
교수신문이 발표한 올해의 한자 성어는 ‘방기곡경(旁岐曲徑)’ 이다. 방기곡경은 사람이 많이 다니는 큰 길이 아닌 샛길과 굽은 길을 이르는 말로서, 정당하고 순탄하게 일을 하지 않고 그릇된 수단을 써서 억지로 한다는 것을 비유 할 때 쓰이는 말인데, 결국 한 해 동안 정도가 아닌 편법과 사술이 횡행했음을 꾸짖는 얘기다.
이에 반해 직장인들이 뽑은 올해의 성어는 ‘구복지루(口腹之累)’였다. 먹고 살 걱정이란 뜻이다. 방기곡경에 푹 빠진 정치인들이 민초들의 구복지루를 헤아릴 겨를이 있었겠는가.
지난해는 ‘병이 있는데도 의사한테 보여 치료 받기를 꺼린다’ 는 뜻으로 과실이 있으면서도 남에게 충고받기를 싫어함을 비유한 ‘호질기의(護疾忌醫)’가 선정된 바 있었다. 또 얼마 전에는 태평성대를 상징하는 길거리 모습과 풍경을 가리킨 ‘강구연월(康衢煙月)’이 한자 성어로 선정된 때도 있었다. 뜻으로 보아 ‘편안한 모습의 거리(康懼)’ 까지는 그래도 괜찮은데 그 뒤의 연월(煙月)이 ‘연기가 피어오르는 달’의 모습으로 설명된다는 게 조금은 꺼림직하다.
물론 국어사전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그대로 옮긴 것이지만 아무래도 ‘달이 뜬 뒤에 피어오르는 연기’라는 점에서 전쟁의 참화, 무덤가를 연상케 하면서 왠지 모르게 불길한 느낌이 든다.
모두가 정치권이 구태를 벗어나지 못한 채 타협과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행태를 빗대어 만들어진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입법부인 국회만 해도 그렇다. 정책다운 정책은 찾아볼 수 없고 온통 남을 헐뜯는 말만 무성하다. 입법부가 입법부다운 역할을 하지 못하고 아까운 시간을 흘려보내며 혈세인 세비만 축내고 있다.
세종시 문제로 국론이 분열과 대결로 치닫고 있다. 국가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사안인 만큼 여ㆍ야가 이해 득실을 따지기 전 국가의 미래를 먼저 생각했으면 하는데 한치의 양보와 타협도 없이 국민의 입장은 하나도 고려하지 않고 오직 자기 주장만 내세운다.
누군가의 주장이 옳을 수도 있지만 또 그릇될 수도 있다. 방패와 창이 되어서는 안 되는데 서로가 방패와 창이 되어 극한 대립을 하고 있다. 사실 요즘 우리 사회는 온통 서로 내뱉은 침투성이로 인해 악취를 풍기고 있다.
해가 바뀌고도 두 달이 되도록 세종시 행정도시 문제를 둘러싼 공방전 속에 서로 제 잘났다며 내뱉은 침이 지천이다. 이를 지켜보는 우매한 국민들은 참으로 답답하고 안쓰러울 뿐이다.
엉뚱한 말인지 모르겠지만 행여 누군가가 당신에게 다짜고짜 침을 뱉었다고 가정할 때 어찌 할 것인가를 묻고 싶다. 아마도 이럴 경우 몇 가지의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 싶다. 우선 첫째, 어이없어 쳐다보는 사람. 둘째, 욕을 하며 화를 내는 사람. 셋째, 분에 겨워 한 대 때리는 사람. 넷째, 발끈해서 자신도 침을 뱉는 사람. 마지막 다섯째, 아무 말없이 침만 닦아내는 사람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십팔사략(十八史略)이 가르쳐주는 대응 방법은 예상을 뒤엎고 ‘얼굴의 침이 마르도록 내버려두라는 것’이다. 누군가가 내 얼굴에다 침을 뱉었을 때 이것을 곧장 닦아 버리면 침 뱉은 사람의 분이 풀리기는커녕 더욱 화가 나서 싸움이 더 크게 번지기 쉬우니 차라리 상대가 뱉은 침이 저절로 마를 때까지 내버려두라는 것이다.
사실 침 같은 것은 닦지 않아도 그냥 두면 자연히 마르게 마련이다. 그러니 그럴 땐 침을 닦아 낼 것이 아니라 그냥 마르도록 내버려두는 게 상책이라는 것이다. 말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바로 지혜가 아니겠는가.
총알을 막아내는 옷이 방탄복이다. 방탄복은 탄성이 큰 화학섬유로 만들어 회전하는 총알을 돌지 못하게 하고 엉기게 하는 특징의 재질이다. 그러나 이런 방탄복도 화살은 막지 못한다고 한다. 압력이 한 점에 집중된 화살촉 앞에는 화학섬유로 만든 방탄복이 아무 소용이 없다.
총알은 막을 수 있어도 송곳으로 찌르면 뚫리는 것이 방탄복이다. 아울러 화살과 송곳을 막는 방검복이 있지만 이것은 날아오는 총알을 막지는 못한다. 모든 것에는 장점도 있지만 단점도 있다는 말이다.
한 마디 더 언급하고자 한다. 미국 휴스턴의 나사(NASA)에 가면 무중력의 우주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볼펜이 있다고 한다. 물론 수천억원을 투자해서 개발한 볼펜이다. 과학자들이 우쭐해 했지만 한 소년이 ‘무중력에서는 연필로 쓰면 되잖아요’ 라는 말 한마디에 쓸데없이 많은 시간과 수천억의 예산을 낭비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만년필, 볼펜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도 연필은 연필로서의 가치가 존재하는 것이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세종시 문제만도 그렇다. 조금만 생각하면 쉽게 해결의 열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노 정권때는 그 시대의 필요에 따라 추진되었을 지라도 새로운 정권이 또 그 나름대로의 필요에 의해 원칙을 바꿀수도 있지 않겠는가.
원칙이 정해졌으니 그대로 추진하자고 고집하는 것도 충정어린 마음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는 하지만 수정까지도 막무가내로 거부하며 침을 뱉는 것은 납득하기가 어렵다. 한 번 길을 정했다고 해서 그 길이 낭떠러지 길인 줄 알면서도 가야된다는 것은 억지다.
우회를 해서 가면 되지 않겠는가. 올해는 경술국치(庚戌國恥) 100년이 되는 해이다. 그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 (1950년) 60주년이 되는 해이자 4.19 민주시민 혁명(1960년) 5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뭔가 매듭짓고 한 차원 높게 승화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한 해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는 서로에게 침 뱉기 바쁜 가운데 고무줄 같은 논란과 공방만 일삼으니 솔직히 부끄럽다 못해 절망감마저 든다. 정치역사가 65년이 다 돼 가건만 아직도 당리.당략과 사욕을 고집하며 ‘원안고수’ ‘수정 보안’을 놓고 일차원적 논란만 거듭하고 있다.
한 국가의 수도가 되려면 통일을 생각하고 물과 산과 평야 등 지형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필자만의 우려겠지만 세종시 안(案)이 차기대선을 위한 정치적으로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정부, 여당은 더 이상 지체하지말고 조속한 시일내 ‘노무현 대못’을 뽑아내고 박근혜 전 대표의 외길을 회유시키는 비장함으로 나서서 소신을 보이며 강력히 추진할 때이다. 더 이상 눈치를 보며 밀려서는 안 된다.
정부가 그렇게 비장함으로 나설 때 비록 차기대선에서 밀린다해도 현 정권의 진정성이 외면 당하지 않을 것이다. ‘입속의 혀(舌)는 도끼보다 더 무섭다. 잘 쓰면 복(福)이 되고 잘못 쓰면 화(禍)와 독(毒)이 된다.’ 법구비유경에 나오는 말이다.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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