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호원칼럼-행복의 진정한 의미


동문기고 안호원칼럼-행복의 진정한 의미

작성일 2009-12-03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이 유행가는 오래 전 가수 최 희준 씨의 18번 곡이다. 삶의 목적을 생각하게 하는 노래여서 필자도 가끔 이 구수한 노래를 흥얼거리며 부르기도 하는 애창곡이기도 하다.

인생은 이 땅에서 영원토록 사는 존재가 아니라 이 땅을 지나가는 나그네요 행인에 불과하다. 그렇다 인생은 나그네와도 같다는 건 분명 맞다. 그러나 그 나그네는 정처 없는 나그네가 아니라 목적 있는 나그네다.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인생이란 나도 모르게 왔으며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고 말한다. 후에 ‘던져진 존재’ 라는 단어는 철학의 중요한 개념이 되었지만 필자로서는 잘못된 개념이라고 지적하고 싶다. 이유는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철저한 계획 속에서 이 땅에 왔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에 던져진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정처 없는 나그네가 아니라 어디로 가는지를 아는 목적이 있는 나그네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보여지는 물질만을 쫓다보니 자신이 어디에서 왔으며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하고 방황하며 살고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이 세상을 살면서도 감사와 참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괴로운 삶을 살고 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오래 가려면 함께 가라’ 는 아프리카 속담이 있다. 어렵고 힘들 때일수록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내일엔 또 내일의 태양이 떠오른다. 어려울 때 누군가가 내미는 손길은 따뜻할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큰 힘이 될 수도 있다. 힘이 들수록 짜증을 내기보다는 서로를 보듬는 마음이 되어야 한다.

지금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 상실감에 젖어 힘겨운 삶을 살고 있다. 그러니 누구라 할 것 없이 서로가 더 많이 안아주고 따뜻한 위로의 말이 필요한 때인 것 같다. 이 세상을 떠날 때 유일하게 가지고 가는 것은 죄이고 남겨놓고 가는 것은 업보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가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을 때가 있다. 좋은 사람을 만나는 만큼이나 좋은 말과 ‘참 만남’도 중요하다. 내 자신을 되돌아봐도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내 자신을 이루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오래 전 언론인 조갑제씨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필생의 어록에서 뽑은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는 말을 인용, 책제목으로 해서 박정희 일대기를 펴낸 적이 있다. 그 책이 발간되자 진보파를 자처하는 진 모씨가 그 특유의 비아냥거림으로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하고 응수해 세인들로부터 지탄을 받은 기억이 새롭게 떠오른다.

며칠 전 단체 산행을 하면서 스틱이 없어 막대기를 대신해 해발 1,111m 정상을 오른 적이 있다. 그 때 등산 장비를 운영하는 친구가 동문회보에 광고를 낸 것이 생각났다.

하산 후 그 친구에게 초보자이니 적당한 가격에 스틱을 보내달라고 주문했는데 하루만에 택배가 와서 뜯어보니 스틱 두 개. 여성용 배낭 한 개와 여성용 장갑 한 개가 들어있는데 20만원 상당에 달하는 물품이었다.

이에 앞서 그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좋은 일 많이 하고 열심히 사는 친구이기 때문에 격려와 위로 차원에서 선물을 하겠다”고 해서 그렇게 할 수는 없으니 청구서를 보내라고 했는데 청구서는 없고 “친구야 항상 좋은 일 많이 하고 열심히 사는 너에게 하는 일 잘 되기 바라면서 크리스마스 선물로 생각하고 보내니 전혀 부담 갖지 말고 사모님과 함께 산행도 하면서 건강한 삶을 살기 바란다”는 친필로 쓴 편지 한 통이 있었다.

이는 그 친구가 동문 회보에 광고를 냈기에 이왕이면 그 친구에게 스틱을 사려고 한 것인데 이 같은 호의를 베풀고 또 따뜻한 말로 나를 즐겁게 한 것이다. 대금도 대금이지만 친구의 어려움을 알아주고 또 열심히 사는 것을 인정받았다는 사실에 난 작은 행복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따뜻한 말 한마디가 그 동안의 고단함을 풀어주고 나에게 새로운 힘을 안겨주었다.

이처럼 말 한마디가 시름에 잠겨있던 마음을 기대와 희망의 시간으로 바꾸며 용기를 불어넣어 주기도 한다는 것이다. ‘기다릴께요’ ‘잘 지냈니?’ 등 안부를 묻는 그 말 한마디가 듣는 사람에게는 커다란 행복과 기쁨을 안겨주기도 한다.

일찍이 행복의 상대성을 갈파했던 칼 마르크스는 “집의 크기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단지 어느 집 옆에 궁전이 들어서면 그 집이 오두막집으로 변해버리는 게 문제”라고 했다. 이는 주변의 부자들이 내게 불행의 씨앗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과거에 비해 훨씬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긴 인류가 왜 여유가 생긴 만큼 더 행복함을 피부로 느끼지 못하고 있는가에 대한 해답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서 행복은 절대적인 부(富)가 아니라 상대적인 ‘부’의 크기에 좌우된다는 것이다.

흔히 현대인들이 별로 행복해 하지 않는 이유로 말하기 좋아하는 부류들은 행복을 운동기구 트레드밀에 빗대 말하기도 한다. 트레드밀 위에서 아무리 땀을 흘리며 달려도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결국은 제자리인 것처럼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도 지나친 과욕 때문에 행복해질 수가 없다는 논리다.

안구 마우스로 일분에 다섯 자를 치는 전 현대모비스 농구코치 박 승일 씨는 “움직일 수는 없지만 볼 수 있음에, 말 할 수는 없지만 생각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살아있음에 행복하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친 과욕의 삶을 추구하며 살아있음의 가슴 벅참과 행복의 진정한 의미를 잊고 사는 우리인 것 같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우리에게는 저마다의 달란트가 다 있다. 그것의 십분의 일만이라도 세상에 내놓아 유익하게 써보자. 그러면 세상이 그나마 살맛이 날 것이다. 아울러 베풂의 즐거움으로 행복감에 빠질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고 내가 기쁨과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위로와 격려의 말, 그리고 관심과 나눔이다.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달려가다 가끔은 말에서 내려 자신이 달려온 방향을 응시한다고 한다. 혹시 자신이 너무 빨리 달려와서 영혼이 뒤따라 오지 못했을까봐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마지막 남은 12월. 주님이 우리 죄를 대신에 희생의 제물이 되시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거룩한 달이기도 한 12월. 성찰의 시간을 가져보자 건강한 성찰의 시간이 주어질 때 비로소 우리는 환각에서 벗어날 것이며 우리의 정신은 제 기능을 회복하고 진정한 행복의 의미를 느끼게 될 것이다.

“도가니는 은(銀)을, 풀무는 금(金)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 성경 말씀이다. 그래서 찬송가 620장을 아주 실감나게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여기에 모인 우리 주의 은총 받은 자여라. 주께서 이 자리에 함께 계심을 아노라. 언제나 주님만을 찬양하며 따라가리니, 시험을 당할 때도 함께 계심을 믿노라. 이 믿음 더욱 굳세라. 주가 지켜주신다. 어둔 밤에도 주의 밝은 빛 인도하여 주신다”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 이 칼럼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