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호원칼럼-백야의 뜨락에 내려앉는 눈을 바라보며


동문기고 안호원칼럼-백야의 뜨락에 내려앉는 눈을 바라보며

작성일 2009-11-20
           
 
 
白夜의 뜨락에 내려 앉는 눈(雪)을 바라보며 
 
 2009년 11월 19일 (목) 08:44:59 안호원 

불가(佛伽)에서는 삼보에 귀의 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의 뜻은 스승이신 부처님(佛)과 부처님의 가르치심이신 법(法)과 그 가르침을 하나가 되게 수행하는 이들(僧)에게 귀의 한다는 것이다.

특히 수행을 하는 과정에서 이들은 자성삼보(自性三寶)에 귀의 한다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자성삼보는 주 심봉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바퀴를 돌아 가게 하듯 그런 부동의 힘을 배출해줄 수 있는 자기의 근본인 불(佛) 그리고 자기의 근본에서 마음을 내는 법이며 승은 이 법에 따라 움직이는 모든 것을 말한다.

이 세 가지가 바로 자기 자성에 있다는 것이다. 자기 근본에서의 삶을 살고자 한다면 천주교에서 일찍이 말했듯 누가 뭐라 해도 모든 것을 내 탓으로 돌리면 불가에서 말하는 계(戒)를 잘 지켜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세상 살면서 남의 탓으로 돌리거나 남편이나, 아내나, 자식, 그리고 부모를 원망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 이유는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존재하고 있는 실체로서 모든 것은 나로 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즉 ‘나’(自我)가 있기에 상대가 있게 되는 것이다. 내가 없으면 상대도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모든 것이 시작되는 나이기에 모든 것을 내 탓으로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지식으로만, 경륜으로만, 말하는 것은 진정한 법이 아니다. 그래서 마음 도리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아주 입이 무겁고 말이 적다. 그리고 자기 근본에 모든 것을 맡겨 그것이 몸 속 깊이 배여 있다가 다시 현실로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가 어지럽고 문제가 되는 것은 사람들이 모든 것을 이론에만 치중하고 지식으로 체험하면서 깊숙이 숨어 있는 자기 마음의 근본을 꺼내 놓는 것이 아니라 항상 지식의 머리를 움직이며 이 세상을 살려고 한다는데 있다.

흔히 스승하면 학식이 꽤 높은 사람만을 생각하는데 스승이라 해서 반드시 엄청난 존재감을 가진 사람일 수만은 없다. 우리가 이 삶의 여정을 거치면서 무수하게 만나는 모든 것들이 스승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에 경험한 어떤 일이 던져준 충격. 선 한 자와 악 한 자로부터의 깨달음에서, 변화의 계기 등이 때론 우리 인생의 참 스승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한 사람, 한 사람, 하나의 사물, 심지어는 들꽃에 이르기까지 스승이 되어 자신의 인생을 결정짓게도 하고 갖가지 길로 안내하는 이정표가 되기도 한다. 결국 자신에게 영향을 끼친 그런 스승의 존재가 있어 오늘의 내가 있다는 것에 대한 깨닮음이 있어야 한다.

고통과 좌절의 순간마다 그런 스승을 떠 올 릴 수만 있다면 나는 절망도 하지 않고 낙오도 되지 않으며 복 된 삶을 사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불가에서는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의식들에 사로 잡혀 본래 하나인 세상의 본질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너와 나로 나누어 보는 것을 항상 경계하라고 한다.

그래서 이런 저런 것을 머리로만, 이치로만 따지지 말고 자기 근본을 믿고 모든 것에 대해 믿고 맡기라는 것이다.

어떤 젊은이가 친구 따라 절에 몇 번 다녀보니 불교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자기도 부처님 전에 보시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그 친구가 좋을 대로 하라며 법당에 올라가 부처님 전에 올리고 오라고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잠시 후 법당에 올라갔던 젊은이가 내려와서 하는 말이 법당에는 금부처만 혼자 앉아 있고 아무도 없어서 보시할 돈을 그냥 갖고 내려 왔다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 젊은이는 부처님 전에 올리는 공양은 더불어 사는 모두를 위해 내주시는 마음이며 정성이라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생활을 하다보면 사실 돈이란 너무나 귀한 것이라서 아무도 없는 곳에서 거기다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도 않고 선뜻 거금을 내놓는 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더구나 자신의 피와 땀이 배인 결정체를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데 ‘알아서 좋은 곳에 쓰십시오’ ‘내 손을 이미 떠났으니 당신 맘대로 사용하시오’라고 생각하기가 솔직히 말해 어디 쉽겠는가.

그러니 그 엄청난 돈을 내면서 생색좀 내려다 아무도 보는 사람도 없고 받아 줄 사람도 없으니 그냥 내려 올 수밖에 없었던 그 젊은이의 마음도 이해 해줘야 한다.

그러나 보는 사람도 없고 받아줄 사람도 없어도 ‘불전함’에 이름도 주소도 적지 않고 돈을 그대로 넣고 간 불자들의 마음은 ‘부처님 전에 올려서 많은 사람들에게 보시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 할 뿐’이라고 생각하는 마음일 것이다.

이는 사찰뿐만 아니라 개신교나 천주교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그 같은 현상은 심안의 눈을 가진 사람들에게나 느껴질 것이다. 심안의 눈을 뜨다는 것은 보여지는 물질의 세계의 일로만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삼라만상을 운용하는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의 이치를 두루 느끼고 지혜로 깨닫게 되는 거시적인 눈을 말하는 것이다.

세상을 그런 눈으로 볼 수 있다면 자신의 가장 가치로운 땀과 노력의 결정체를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조건 없이 내려놓을 수 있는 마음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나와 더불어 남에게 베풂으로 아름다운 인연과 덕으로 이어지게도 하면서 나름대로 삶에 대한 보람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실 그런 생각마저도 자신을 낮추는 사람들에게는 욕심과 사치가 되겠지만….

지난 15일은 기독교 전체가 추수감사절기로 감사의 예물을 드리는 특별한 날이다. 모두가 첫 수확의 예물을 누가 보든지 말든지 정성으로 헌금함에 넣어 제단에 받쳤다. 과부가 가지고 있는 재물 모두를 헌금으로 드리면서 예수님께 칭찬을 받는 말씀이 생각난다.

바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모든 것을 바라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순종하며 내려놓는 마음 또한 중요하리라 본다. 온 세상을 하얗게 칠 한 설경, 지금은 깨끗하게 보여도 눈이 녹으면 더욱 지저분해진다는 것을….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 이 칼럼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