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호원칼럼-마음의 평화를 찾으려면


동문기고 안호원칼럼-마음의 평화를 찾으려면

작성일 2009-10-23
           
 
 
마음의 평화를 찾으려면 
 
 2009년 10월 22일 (목) 09:17:57 안호원 
 
사람이 끊임없이 자신을 수양하는 것은 넓게는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함이다. 옳지 않은 길을 갈 때 마음의 갈등을 일으키는 것도 내면적으로는 평화를 깨트리고 싶지 않은 본능이 스스로에게 경종을 울려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란 속물 근성이 마음속에 평화로운 낙원을 만들기는 그리 쉽지만은 않다. 쉽지 않은 게 아니라 탐욕이 차고 넘치는 인간 사회 속에서는 어쩜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나는 그대로 있고 싶은데 불어오는 바람이 나를 그대로 두지 않고 흔들어 놓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선택의 기로에 놓여지기 일쑤다. 그러다보니 원하지 않은 일까지도 어쩔 수없이 해야할 때가 너무도 많다. 하다 못해 피를 나눈 형제지간에도 마음의 평화를 깨트리며 원수처럼 될 때도 다반사다. 그러니 타인과의 관계인들 오죽 하겠는가.

혼자서 산다면 이 같은 갈등으로 괴로워하지 않겠지만 안타깝게도 인간이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이다. 단 한시도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 숱한 선택과 상황들, 어떻게 대처해야 마음의 참 평화를 얻을 수 있을까? 쉽지는 않겠지만 역시 참 선(禪)의 마음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대나무가 똑바로 자랄 수 있는 이유를 생각해보자. 그렇게 곧게 자라는 것은 ‘중간의 마디’ 때문이다. 줄기 중간중간 마디들이 끊어주기 때문에 강하고 곧게, 위로 자랄 수 가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다른 나무에는 없는 마디가 왜 생기는 것일까?

일종의 멈춤의 지혜라고 했다. 즉 성장을 멈추고 기다리면서 새로운 힘을 모은다는 것이다. 이때 마디가 생긴다. 바로 이 마디의 힘이 나무를 강하게 만들고 수직으로 곧게 솟구치게 만든다고 한다. 내가 어떤 처지에 놓여있더라도 감사하는 마음만 있으면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에 처해져도 그것의 비중은 작아질 수밖에 없다.

최근에 음주운전으로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려 도주하다 차가 폭파되면서 귀중한 생명을 잃은 사람이 있다. 고인에게는 안 된 말이지만 그는 단 돈 2만원의 대리기사비를 아끼려다 몇 배나 더 큰 손해를 보았다. 차량은 물론이지만 하나밖에 없는 고귀한 생명을 잃었다. 불심검문에 걸린 것을 감사해야 했다.

또 다른 한 예로 한 밤 중에 인적이 드문 골목길을 가다 칼을 든 강도를 만나 돈지갑을 빼앗겼다고 가정해보자. 이 때 돈지갑만 빼앗긴 것을 생각하면 분하고 억울한 생각이 들겠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목숨을 잃지 않는 것에 대해 감사한다면 오히려 마음이 평온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음의 평화가 바로 이런 것이다. 아무리 극한 상황에 처해있다 할지라도 이 보다 더 큰 불행이 내게 일어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부귀 영화와 명예와 직위에도 인간에게 참다운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인간의 행복. 그것은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결국 내 마음안에서 피어나는 것이다.

아내를 사랑하고, 또 남편을 사랑하고 자식을 사랑한다면 그런 나는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다. 대부분 그 같은 사랑을 받으려고만 하고 또 해주기만을 바라며 기다리다보니 역(逆)으로 미움이 생기면서 다툼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성경에도 “주는 자가 받는 자 보다 더 복이 있다” 고 기록되어 있다. 받으려고 하거나 무엇인가 해주기를 바라기에 앞서 먼저 나눔과 베풂의 마음이 될 때 비로소 마음에 평화가 올 수 있다. 그런 마음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대나무의 마디처럼 멈춤과 기다림의 지혜가 필요하다. 대나무의 마디가 가치 없는 것이 아니라 더 강하게 하는 농축된 힘을 발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멈춤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재해석 해볼 필요가 있다. 이는 멈춤으로 인해 마디가 생기고 그 마디의 힘으로 더 확실한 미래의 길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어찌보면 멈춤은 삶의 어두운 부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식물은 밤에 자란다는 말을 새겨들어야 한다. 다시 말해 삶의 어두운 체험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어둠을 통과한 이후 밝은 빛에 더욱 강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헤일 수 없는 많은 날을 지칭할 때 ‘새털’ 같이 많은 날들이라는 표현을 잘 쓴다. 그러나 그런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것을 비유한다면 ‘새털’이 아니라 ‘쇠털’ 이라고 해야 맞는다. 다여우모(多如牛毛)란 한자성어를 보면 더욱 더 그렇다.

아무렴 덩치 큰 소의 털이 새털에 비하겠는가. 그렇다면 쇠털의 반대말은 무엇인가? 그건 봉모(鳳毛), 즉 봉황의 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허상의 털이라니 구경조차 한 사람이 없을 만큼 귀한 존재을 일컬어 하는 말이기도 하다.

아무리 쇠털 같은 날들이라 하지만 우리의 삶은 되돌아보면 짧기만 하다. 그런 삶의 날들이기에 우리는 그 날들을 함부로 떠나보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세상을 살다보면 좋을 때도 있지만 우울할 때도 힘든 때도 있을 수 있다. 좋은 때보다는 힘든 때가 더 많았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어려운 난관에 부딪칠 때라도 대나무의 마디에 힘처럼 멈춤의 지혜로 더욱 강해지는 힘을 길러야 한다. 모든 것에 감사하는 평화의 마음이 되면서 남에게 베풀 수 있는 존재로 변하는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 세상은 혼자만이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아니라 함께 공생공존(共生共存) 사슬의 세상이다. 그래서 내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곁에 있는 또 다른 사람이 나를 통해 행복함을 추구하게 만들어줘야 한다. 세상을 살다보면 어찌 좋은 일만 있겠는가?

참을 ‘忍’자 세 번이면 죽일 자도 살린다고 했듯이 화가 날 땐 ‘멈춤 버튼’을 누르도록 하자. 그것이 겸손이요, 온유다. 분노를 터뜨리지 말고 또 다른 이의 속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바로 마음의 평화를 찾는 길이다.

어제 밤 필자는 아내와 사소한 일로 큰 소리를 냈다. 물론 곧바로 화해를 했지만 미처 멈춤버튼을 누르지 못한 것이다. 결과는 마음 깊은 곳에 상처와 후회만 가득 할 뿐이다. 나만을 생각하는 욕심을 버리고 손해를 볼 줄 알아야 진정 마음에 평화가 안주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 이 칼럼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