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기고
안호원칼럼-작은 베풂의 실천도 축복
“작은 베풂의 실천도 축복”
2009년 10월 08일 (목) 09:16:36 안호원
매년 추석 때만 되면 어김없이 언론에 이웃을 돕는 미담 기사가 나오고 기업이나 봉사단체, 대학 동아리들의 자원봉사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사람들에게 진한 감동을 안겨 주고 있다.
또 인기연예인들이나 운동선수들이 내놓는 기부금도 적지 않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프랑스나 미국처럼 부자가 거액을 기부금으로 내놓고 장기적인 자선 활동을 한다는 기사는 별로 보지 못한 것 같다. 그나마 현직 대통령이 유일하게 전 재산을 장학기금으로 출현해 다소나마 위안이 된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문제는 이 같은 미담의 주인공들의 공통점이 빈곤층이라는 것이다. 그 분들의 아름답고 풍요로운 마음에는 절로 고개가 숙여지지만 왠지 모르게 부아가 치민다. 왜 자신조차도 살기 힘든 데 오히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생각하며 스스로가 조건 없이 기부금을 선뜻 내놓을 수가 있단 말인가.
잘 먹고 잘 입고 잘 쓰며 큰 소리 치던 사람들, 거대한 기업을 운영하는 기업주, 많이 배워 학식이 깊다는 지식인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인기척도 없다. 그동안 언론에 보도된 기사들을 간추려보면 기부자들이 대개 홀로 된 할머니들이나 기초 생활수급자, 일본군 종군 위안부, 그리고 상이용사들이다.
모두가 힘겹게 일하고 변변하게 먹지도 못하면서 모은 전 재산을 학교나 병원과 자신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내놓았다. 어떤 생활 수급대상자는 정부에서 지원 받는 월 44만원의 생계비와 경로수당을 모아 기부했고 또 일본 종군 위안부로 고초를 당한 할머니들이 장학금으로 전 재산을 내놓았으며 독거노인 여섯 분은 추석을 맞이하면서 전 재산을 유산으로 ‘사회복지공동 모금 회’에 기부하기로 약정을 했다.
한편으로는 각종 사회봉사 단체를 통해 불우이웃 돕기를 하고 외국의 가난한 아이들과 결연을 맺고 정기적으로 돈을 보내는 아름다운 이들의 미담도 읽었다. 또한 방송사에서 자선 특집 프로를 진행이라도 할 때면 휴대전화로 1000원, 2000원을 보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는 것을 자막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그런 아름다운 마음이 아직은 깃들어 있다.
그렇지만 아직 우리는 기부문화에 익숙하지 않다. 전반적으로 우리 사회 통념상 외롭고 가난한 빈곤층 사람들의 등 뒤에 숨어서 밖으로 나오지 않으려고 한다. 우리의 기부문화의 중심이 삼성, 현대가 아니면 저렇게 제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는 빈곤층의 할머니나 장애자 심지어는 기초생활 수급대상자가 되어야 하는가.
그 중간층인 중산층은 다 어디로 갔다는 말인가? 우리의 기부문화가 발달하고 정착되어지려면 직장을 다니거나 적든 많든 고정 수입이 있는 중산층이 나서야 한다. 그들보다 더 부유한 중산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부문화의 중심이 홀로된 할머니나 가난한 계층이 되어 화제기사 미담 기사가 되는 것은 정말 부끄럽고 싫다.
베풂과 나눔에는 아주 인색하고 무관심 하면서도 어린 문근영이 남몰래 선행을 베푼 것에 대해 악플 달기에 분주하다. 미국 기부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철강왕 카네기는 “부자의 모습으로 삶을 마감하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 이라는 말을 남길 정도로 활발한 자선 활동을 펼치면서 ‘위대한 기부자’라는 명예로운 전당에 그 이름이 올랐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의 물질 소유에 대해 “너희를 위해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고 가르친다. 이처럼 성경의 교훈은 우리가 가진 재화를 자기 충족의 소유로서만 만족하기보다는 그 물질의 사용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 을 위한 것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재화란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꼭 필요한 요소임에는 틀림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무엇이 우리에게 더 먼저 소중하고 중요한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I)로부터 벗어나 우리(We) 라는 보편성을 띤 공동체로의 ‘나눔의 장’을 만들어서 이 사랑의 계절, 수확의 계절을 떠나보내는 것은 어떨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 같이 우리의 조그마한 생각과 배려가 만들어내는 잔잔한 감동의 물결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내가 가진 소유를 적은 ‘행복 나눔’과 ‘사랑 실천’의 대열에 동참하면 어떤 기분이 될가를 생각해보자. 그래서 나의 작은 나눔의 실천이 소외되고 어려운 이웃들에게 정말 큰 힘이 되고 그들에게 꿈을 실현 할 수 있는 ‘기적의 방주’ 가 될 수 있음을 스스로에게 알리고 기억하는 우리가 되어보자.
그 기적의 방주에 우리가 자그마한 연료를 실어주어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이 추운 겨울을 이겨낼 수 있도록 소망의 물결이 넘실거리는 ‘감동의 파노라마’를 연출해 보는 그런 따듯하고 소중한 결실의 열매를 맺는 계절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얼마 전 아름다운 재단이 발표한 2007년 한국인의 기부지수를 보면 지난해 55%로 2005년도에 비해 무려 13.6%나 줄어 든 것으로 집계됐다. 무엇보다 기업이 아닌 개인기부가 월등히 낮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고귀한 신분’ ‘책임이 있다’라는 뜻이 담긴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천하는 가장 대표적인 나라는 프랑스인데 이 나라의 상류층은 지금도 부(富)의 일부를 사회에 기부하는 전통을 갖고 있다. 이들에게는 오랜 기독교적인 전통과 사회적 책임의식이 더 해져서 생겨난 아주 아름다운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유럽에서 시작된 이 같은 기부의 역사가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과거 유럽 귀족의 전유물로 여겨왔던 기부문화가 새로운 기부문화를 발전시키고 미국의 전유물로 여길 만큼 정착되었다. 그 대표적인 기부자들이 철강 왕 카네기를 비롯 록펠러, 그리고 워렌 버핏. 조지 소로스 등을 꼽을 수가 있다.
우리도 외국처럼 부자들이 사회봉사단체를 더 많이 설립, 기부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면서 빈곤층인 저들이 평생 모은 재산은 자신들의 안락한 노후생활을 위해 마음 놓고 쓰게 했으면 한다.
올해도 역시 아내가 예전처럼 내게 추석 선물로 들어온 ‘김’ 과 ‘과일’ 등을 몇 개의 봉투로 나누고 또 몇 개의 작은 봉투를 준비해서 이웃들에게 베풂을 말없이 실천한다. 사실 나 자신도 넉넉지 못해 인색해질 수밖에 없는데 아내의 그 같은 선행은 나를 숙연하게 했고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해준다.
늘 그렇지만 아내는 어려운 생활에도 불구하고 베풂의 넉넉한 마음으로 이웃을 생각하며 물건을 나누기도 하지만 때론 돈을 쓰기도 한다. 어찌보면 나보다 마음 씀이 더 크고 넓다. 그런 아내가 내 곁에 있다는 사실에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끄러움과 부족함을 느낀다.
남을 위한 봉사는 사실 내게 있어서는 즐겁고 보람 된 삶이라 할 수 있다. 나눔의 기쁨, 해 본 사람만이 그 참 맛을 알 수 있다. 성경을 굳이 인용하지 않아도 인생을 빚진 자의 삶이라고 전제 할 때 긍휼을 베푸는 것은 내가 진 사랑의 빚을 갚는 것이다. 작은 베풂의 실천, 내게는 커다란 축복이다.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추석도 지나가고 점점 추위가 다가오는 계절이다. 한가위 인심인 우리의 따뜻한 마음들이 널리 널리 퍼져 이 겨울이 따뜻한 겨울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 이 칼럼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