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기고
안호원칼럼-억울한 인생이 어디 너 하나 뿐이 겠는가
"억울한 인생이 어디 너 하나 뿐이겠는가"
2009년 09월 17일 (목) 09:23:40 안호원
며칠 전 관할 구청을 찾아 가서 잘못된 행정을 지적하며 분노를 터뜨린 적이 있다. 꾸준히 지적을 하면서 민원의 결과를 기다려왔는데 여전히 시정이 되고 있지 않아서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공무원이 안일한 자세로 상사를 두둔하며 구청장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는단 말인가. 생각 같아서는 상급 기관에 진정을 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몇몇 공무원이 문책을 당할 것 같아 분한 마음을 애써 참으며 구청을 나온 적이 있다.
희로애락의 감정 중 분노는 다툼을 일으키고 평화를 파괴시킨다. 살면서 분노가 없을 수는 없지만 그대로 다 표현하면 반드시 후회를 하게 된다.
분노는 사람의 생각을 마비시키고 사리 분별을 흐르게 한다. 따라서 분노를 쉽게 내는 사람일수록 돌이 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결국 분노는 자신의 삶을 파괴하는 무서운 독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성숙한 사람은 마음에 분노가 들어올 때 부드럽게 자신의 마음을 다스린다.
누구나 한 두 개 쯤 마음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갖고 있을 것이다. 때로는 억울한 일로 고통을 받게도 된다. 모 정치인이 자신의 비리를 수사하는 검찰 수사관에게 “억울하다” 고 항변하자 수사관이 “이 방에 들어온 사람들이 다 그런 말을 하지만 나중에는 잘못을 알고 죄송하다는 말을 한다”고 해 그 정치인을 머쓱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허기 사 세상에 억울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어디 그 한 사람 뿐이겠는가. 이 세상을 살다보면 참으로 억울한 일을 당할 때가 있을 것이다. 또 자신이 억울하다며 너절한 변명을 늘어놓는 뻔뻔한 사람도 있지만 대체로 주변 사람들이 참과 거짓을 구분하기가 쉽지는 않다.
참이든 거짓이든 자신이 억울하게 생각함에도 불구, 영어(囹圄)의 몸이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기는 커녕 자신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증오하며 복수를 하려고 악한 마음을 품게 된다.
이제는 우리 기억에서 어느 정도 잊혀진 영화지만 ‘빠삐용’이 생각난다. 주인공 빠삐용이 악마의 섬에서 탈출 할 때 “네가 아무리 이 섬에서 탈출한다고 해도 네 마음의 감옥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너는 여전히 감옥 속에 갇혀 사는 거다” 탈출을 지켜본 죄수 동료 드가가의 뼈있는 말이다.
실화를 소설화 한 것인데 영화로 된 ‘빠삐용’은 1930년 20세의 젊은 청년 앙리 사르에르가 파리 한 시내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 마침 주변에서 살인 사건이 나면서 실적에 눈이 어두웠던 검사에게 범인으로 체포되어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했으나 끝내는 악마의 섬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그 때부터 그는 자신의 운명을 바꾸고 청춘을 빼앗은 그 검사에게 복수하기 위해 필사의 노력 끝에 탈출에 성공, 그 검사를 찾아 복수를 하기 위해 돈을 모은 후 다시 파리로 돌아와 자신이 젊었을 때 다니던 거리와 어린 시절 부모와 함께 다니던 고향의 교회까지 찾아간다.
그리고 지난날의 추억을 더듬으며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다. 순간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성경 말씀이 떠오르면서 가슴이 뜨거워짐을 느낀다.
그래서 그는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마음을 바꾼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한다. “주여, 제가 복수를 포기하겠사오니 지상에서 다시는 이런 억울한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소서” 그리고 자신에게 속삭이듯 말을 한다.
“사르에르야. 네가 바로 승자다. 네가 진정으로 자유자다. 너는 그 검사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더 이상 알려고 하지도 말라. 그는 네 과거의 한 부분일 뿐이다. 너는 이제 그만 그를 용서해라” 샤르에르는 마침내 30년 동안 자기를 가두고 있던 감옥으로부터 완전하게 참 자유를 얻은 것이다. 그래서 그는 가장 위대한 자유자요, 진정한 행복자가 된 것이다.
과거 역사를 보아도 거듭되는 복수와 앙갚음의 결말은 당연히 관련된 사람의 대부분을 불행하게 만들고 자신도 불행으로 생을 마감한다. 그 불행은 끝이 없다. 원한에 사무친 분노의 마음이라는 것이 그렇게 힘이 들고 무섭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인간의 마음은 참 요상한 것 같다. 좋은 인연으로 만나면 더 없이 선하고 좋은 일로 이어지게 만드는 것도, 악마와 같은 증오심과 괴로움으로 몸부림치게 만든 것도 인간의 마음인 것 같다.
요즘 국회는 인사청문회로 모처럼 바쁜 나 날을 보내고있다 청문회에 나온 분들은 한결같이 자신들이 억울하다고 한다. 진짜 억울한지는 본인만 알겠지만 언제나 청문회에 나오기만 하면 그처럼 훌륭한 분들이 망가가 된다.
어찌하다보니 돈이 있어야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현실. 빈자와 약자들은 할 수 없는 법을 어기고서도 아니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어도 잘못을 지적하면 억울하다며 변명만 일 삼는 저들에게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가 없다. 그러나 저들에게 마져도 분노를 느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모든 일에는 각자의 형편이라든가 사정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어느 것 하나를 두고도 옳고 그르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누구든 나름대로의 기준에서 분노를 느낄 수가 있다. 다만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나 어떤 특정인을 향해 극심하게 원망하고 증오하는 일이 생겼을 때 그 마음을 한 번이라도 내려놓으려고 했다면 설령 처음에는 억울해서 분노하는 감정이 들끓어도 결과는 좋게 될 것이다.
그것은 증오의 대상을 생각해서 참는다든가 내 양심을 걸고 억지로 용서해주는 게 아니라 순전히 나를 위해서 나를 이익 되게 함이다. 그 사람이 분명 내게 화를 내게 할지 언정 곧 바로 분을 참지 못하고 화를 내는 것 자체가 나에게 좋지 않은 일로 반드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몇 해 전 모 방송국에서 주말드라마로 ‘전설의 고향’을 방영했는데 이 드라마의 주제는 약자가 강자에게 억울한 죽임을 당한 후 원혼을 품은 원귀가 되어 강자에게 복수를 하고 구천을 떠나는 것이다.
결국 인과응보의 교훈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드라마는 누구를 용서하거나 은혜를 갚았다는 이야기는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다. ‘복수는 복수를 낳게 되고 피는 피를 부른다’ 는 말이 있듯 복수와 앙갚음은 끝이 없다. 끝없이 계속 거듭 된다.
쉽지는 않겠지만 이제 모두 증오와 분노의 마음, 그리고 미움의 마음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래야 사르에르처럼 자기를 가두었던 감옥으로부터 탈출해서 참 자유를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우리 마음에 상처를 입었던 모든 일들이 공(空)이 되어 과거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면 더 이상 되갚고 되갚는 복수극이 반복되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인과응보의 ‘전설의 고향’이 또 다시 재현되지 않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먼저 그 고리를 끊고 놓아줘야 한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하시며 죽음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절규하던 예수님도 정작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운명을 하시면서도 자기를 처형하는 로마 병정들과 제사장을 용서했다.
억울함으로 치자면 예수님보다 더 억울한 사람이 있을까 그 분의 마음으로 분노를 삭이고 녹여야 한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그리스도의 용서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자. 그러면 분노의 마음이 갈아 앉을 것이다.
가을이 깊어가면서 겨울이 임박하고 있음을 창 밖의 바람으로 느낀다. 그래서 주변의 이웃들의 겨울이 더욱 염려스러워진다. 어느 누구든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겨울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작은 것에도 쉬이 분노를 느끼며 넓은 마음으로 용서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필자도 역시 늙기는 늙었나보다. 부끄럽다.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 이 칼럼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