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호원칼럼-자기를 비운 아름다운 마음


동문기고 안호원칼럼-자기를 비운 아름다운 마음

작성일 2009-08-14
자기를 비운 아름다운 마음 
 
지난 5일은 음력 4월 보름부터 7월 보름까지 석 달간 사찰에서 고행하던 수좌스님들이 저마다 새 화두를 붙들고 바랑을 메고 산문을 나서는 하안거(夏安居) 해제일이다. 하안거에 참여하는 수좌 스님들은 밤 12시에 취침하고 새벽 2시에 기상, 엉덩이를 방바닥에 붙인 채 자신의 참 나(自我)를 찾는 수행에 집중한다.

이들은 이 같은 수련이 누가 시켜서보다 자기 스스로가 선택한 일이기 때문에 이 같은 수행을 고생으로 받아드리지 않고 용맹정진에 돌입한다. 저 마다 바랑을 메고 일주문을 나서는 수좌들은 과연 석 달의 긴 안거를 통해 무엇을 얻고 또 무엇을 내려놓았을까. 그리고 무엇을 지우고 무엇을 보고 깨달았을까. 아무도 그들을 기다리지 않지만 이제 만행을 떠나야 하는 수좌들. 수행을 끝낸 그들이 마음의 짐을 덜어놓았을까. 아니면 더 큰 짐을 짊어지고 산문을 나서는 것일까.

산문을 나서는 일주문에는 ‘불이문’(不貳文)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둘이 아니다’는 것이다. 그렇다. 산문 안과 밖. 내 안의 마음과 밖에 있는 마음, 시작과 끝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이다. 2550년 전 오랜 세월 내려오던 인도의 브라망교(힌두교의 전신)의 생명이 시들해지고 껍질만 남게 됐다. 성직자는 계급을 나누고 제사를 지낼 뿐이었다. 정작 사람들에게 직결되는 삶의 고뇌, 생활의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사람인 붓다가 나타난 것이다. 붓다는 빈자, 강자와 약자, 귀족과 천민을 가리지 않고 삶의 고뇌와 생활의 고민을 어우러 주면서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2009년 전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다.

숱한 세월 지켜오던 유대교가 빛깔만 번지르르 할 뿐, 껍질만 있었다. 신의 뜻은 저버린 채 제사장들은 제의와 율법에만 관심이 있을 뿐 교인들의 고뇌와 일상의 문제는 외면했다. 이때도 마찬가지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가 등장 한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외친다. “어리석고 눈 먼 자들아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인자가 바라는 것은 동물을 잡아 그 피로 받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사랑” 이라고.

그래서 기독교라는 깃발이 또 새롭게 세워진다. 그러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가 다시 허울 좋은 빛깔의 깃발이 되어 펄럭인다.

어째서 동안거, 하안거의 선(禪) 수행, 산상 기도가 숫한 구도자들로 이루어지는데도 왜 그 같은 수행이 어렵디 어려운 고행으로만 비춰지면서 이 땅에 바르고 옳은 사람 들이 적은 것 일까. 묻는다. 왜 성직자들이 속세를 떠난 생활을 하면서 깨달음의 안목보다 연륜과 계파를 더 따지고 인맥을 형성하며 줄서기를 하는가. 수도자로서 세상 탐욕을 버리지 못한 채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치유치 못하고 비우지 못 한 게 아닌가.

불교계의 총무원장, 기독교 계 총회장 선거 때마다 불거지는 추태. 정치판 같은 세속적인 꼴불견이랴. 결국 구원의 창구로서 신성하고 거룩해야 할 교회마저 안타깝게도 과거 2500여 년 전으로 돌아가면서 사업의 수단으로 전락하고야 말았다. 그래서 감히 노스님을 만나 또 묻는다. “스님은 불교 수도승으로 평생을 살아오신 것 같습니다. 이제 열반을 앞두고 깨달음 같은 어려운 것들을 제외하고 스님이 이 생에서 이루고 싶으시고 싶은 게 있다면 무엇을 이루고 싶으신가요?”

스님은 거침없이 즉각적으로 대답한다. “행복해진 것이다. 나의 수행은 내가 쓸모 있는 삶을 살도록 도와준다. 만일 내가 짧은 순간이나마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었다면 내 삶은 어느 정도 목적을 이룬 것으로 본다. 그것은 내게 깊은 정신적 만족감을 안겨 주기 때문이다. 이 느낌은 나 자신이 타인을 위해 봉사 할 때면 언제나 찾아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도울 때마다 난 행복을 느낀다. 따라서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의 자비, 서로를 보살펴주는 마음” 이다.

살아있는 존재라도 서로 사랑하고 자비를 베풀 수만 있다면, 무엇보다 나를 미워하는 이들까지 그런 마음을 가질 수만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참 다운 사랑이고 자비일 것이다. 인내하며 용서하는 마음을 가르쳐주는 훌륭한 스승은 다름 아닌 나의 반대편에 서서 나를 힘들게 하고 적대시 하는 사람이다.

진정한 자비심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볼 줄 아는 마음이다. 종교인이나 정치인들 모두 똑같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처하는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 살면서 슬픔도 많고 외로움도 많고 고독함도 많고 또 허망한 일, 미움도 많은데 그것이 다 어디서 오는 지 알 수 없고 스쳐가는 것조차 모르고 산다면 다른 동물과 하등 다를 것이 무엇이겠는가.

스스로는 무한 한 능력을 가졌다고 자부하면서도 한 치 앞을 내다보는 안목을 갖지 못해 아웅다웅 싸우며 살고 있으니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운 심정이다. 야수들은 보이는데서 서로에게 잡혀 먹히고 잡아먹지만 배가 부르면 살생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들은 보이지 않게 서로의 정신을 갉아 먹고, 먹히기도 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인간은 배가 불러도 싸움을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어차피 태어난 이상 먹을 것, 입을 것, 쉴 곳은 기본적으로 있게 마련인데 물고 뜯으며 다른 사람의 가슴에 상처를 남기며 눈물을 흘리게 하며 산다는 게 볼썽 사납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한 생의 삶을 미움과 괴로움 속에서 보낸다면 억울하지도 않은 가. 만물의 영장이라 하는 인간들이 우물 안 개구리처럼 하찮은 욕망 때문에 뺏고 빼앗으며 괴롭게 지내다 결국 아무것도 갖지 못하고 두 손을 편 채 떠나야 한다는 것이 너무 허망하지 않은가.

누가 뭐라 해도 김영삼, 김대중 전직 대통령은 과거 박정희, 전두환 정권의 격랑 속에서 민주화 투쟁의 한 배에 탔던 생사의 동지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특히 두 분은 영남과 호남을 대표해 민주화를 부르짖으면서도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서로를 헐뜯고 싸우면서 그것도 부족해 지역 분열까지 야기 시킨 장본인들이다.

더구나 이들은 반세기를 경쟁과 반목을 거듭하면서 숙명적인 라이벌이 되어 상대에게 심한 폭언을 서슴지 않고 퍼붓기도 한 숙적 사이다. 그런 관계에서 원인이야 어디에 있든 YS가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었다. 참으로 쉬울 것 같지만 어려운 일을 해냈다.

YS말대로 이제는 그런 분위기로 바꿀 나이가 된 것이다. 그러나 YS가 이번 방문에서 “우리가 한국의 민주화 정치에서 제일 큰 역할을 했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초기에는 그랬다. 그러나 두 분 모두가 민주화 껍질만 들고 정(情 )많은 국민을 앞세워 자신의 욕망을 채우며 수많은 국민들의 가슴에 상처와 눈물을 남겼다는 것을 사실도 알아야 한다.

두 분의 전직 대통령이 정치가로서는 유능하고 능숙했을 수는 있었어도 존경 받을 만큼의 민족 지도자는 아닌 듯싶다. 어리석은 필자의 입장에서는 참다운 민족지도자는 자기를 버려야 하는데 두 분은 지금까지 그렇지 못한 것 같아서 감히 하는 말이다.

두 분은 정치인이기도 했지만 종교를 갖고 있는 신앙인이기도 하다. 종교를 떠나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잘못한 것을 생각하고 뉘우친다고 한다. 바람이 있다면 DJ가 하루빨리 병석에서 일어나 고해는 아니지만 그동안 의혹에 쌓여있는 재산축적, 광주사태, 6.15선언, 등 등에 대해 솔직히 털어놓고 잘못된 점이 있다면 인정하고 국민들에게 이해를 바랬으면 한다.

DJ가 어려우면 가족이라도 그렇게 해 국민들과 화해의 길이 열렸으면 하는 마음이다. 물론 YS도 마찬가지다. 말로만 민주화를 찾는 대통령을 뽑아주고 지역 분열에 동참한 우리도 할 말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 이 칼럼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