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기고
안호원칼럼-지킬것이 있는 것에 목숨을 걸라
지킬것이 있는 것에 목숨을 걸라
어떤 사람이 개울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고 하자 그 사람은 고기를 잡기위해 그물을 치고 바닥을 훌 터 고기를 내 몰았다. 그 바람에 개울은 온통 흙탕물이 되어버렸다. 지나가던 마을 사람이 그 광경을 목격하고 마을 사람들이 마시는 물을 더럽힌다고 나무랐다. 그랬더니 고기를 잡던 사람이 이렇게 하지 않으면 먹고 살 수 없다고 했다.
이 숍이 살던 때의 옛날이야기가 아니다. 어느 사회나 다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아무리 민주국가라해도 구성원 모두가 100%로 사고가 일치 할 수는 없다. 자연스럽게 양분화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득을 얻는 쪽이 있는가 하면 반드시 손해를 보는 쪽도 있게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득을 보는 쪽이 다수냐 하는 것이다. 마을 사람 절대 다수가 이 개울물을 마셔야 한다면 고기를 잡기 위해 개울물을 흐리게 한 사람을 고기를 못 잡도록 제지해야 한다.
그래도 고집을 부린다면 그가 갖고 있는 그물을 빼앗아야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 사람이 굶어 죽지 않도록 하기 위해 땅 뙈기라도 나눠줘서 앙심을 품지 않고 개울을 더럽히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게 아깝다고 동네 사람들이 무조건 내치기나 하고 자신들이 먹을 물을 더럽히는 것을 방관하거나 나는 생수를 사다먹으니 상관없다는 식이 되어 나 몰라라 하면 안 된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 살고 있는지 주위를 한 번 살펴보자. 계곡 위에 버티고 서서 물을 더럽게 만드는 사람들이 예상외로 너무 많은 것 같다. 계곡에 발을 담근채 양 쪽에서 서로 질세라 상대 얼굴에 물을 끼얹으며 흙탕물을 내려 보내고 있다. 요즘 사회를 보면 저만 잘 났다며 안하무인眼下無人의 사람들의 행태에 누구 하나 나서서 지적도 하지 못한 채 어처구니없는 모습으로 열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이런 때 교통정리도 하고 써 먹으려고 민초들의 살(肉과 피(血)인 비싼 세비 줘가면서 뽑아놓은 백성의 대표들이라는 자들이 언제 백성을 아끼고 생각했냐는 듯 고개를 바짝 쳐들고 백성 위에 군림하면서 백성들의 아픔을 외면한 채 흙탕물을 만든 사람 눈치 보며 제 몫 찾기 에만 급급하고 손발이 너무 바쁘게 움직이는 것 같이 비쳐진다.
맑은 물이 흙탕물로 뒤엉켜도 물을 정화 시킬 생각은 추호도 없고 더러운 물을 거둬낼 의지도, 능력도 없다. 법정 회기 중임에도 불구하고 의사당은 조용 할 날이 없다. 온통 전쟁 직전의 격전지 같은 살벌한 분위기다. 그저 가엾은 이 나라 백성들이 흙탕물을 마시며 언젠가는 모래가 가라앉기를 기다리며 목이 새카맣게 타들어가고 있다.
특히 누군가는 나서서 이 일을 해결하겠지 하다 보니 침묵으로 일관했던 다수마저 붕괴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일부는 개울을 흙탕물로 만든 쪽과 한 편이 되어 경고 망동한 언사를 써가며 다른 한 쪽을 헐뜯고 또 다른 일부는 힘에 부치자 아예 모든 걸 체념해 버리는 안타까운 사회로 전락하고 있다. 더욱 안타깝고 마음 아픈 것은 중산층이 와해되면서 우리 경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어느 전쟁보다 더 무서운 내분의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데도 모두가 위기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세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다. 하고 있는 일도 각각 다르고 태어난 곳도 다르고 자란 환경도, 학력도, 성격도, 나이까지도 제각기 다른 상황에서 공동생활을 하게 된다. 그런 관계다 보니 모든 사람들의 생각도 천차만별의 사고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 까닭에 누구나 자기의 생각을 말 할 수 있고 또 자신의 선택에 의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공동체의 생활 속에서는 조직의 평안을 위한 질서가 있다. 그래서 조직에서 결정 된 사항에서 대해서는 조직원이 반드시 준수해야 할 의무도 있는 것이다. 그런 삶의 과정을 자신의 잣대에 맞춰 단순히 평탄하다. 험난하다고 단정 짓는 것은 매우 위험한 처사이다. 어떤 삶에 있어서도 중요 한 것은 ‘어떤 행동’이 아니라 ‘어떤 것을 지킬 것이 있는 삶’ 이다.
목숨을 걸 만큼의 지킬 것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좋은 조건을 다 갖추고 있어도 지킬 것이 없으면 모든 것이 헛됨과 허망함으로 쉽게 무너지게 된다. 세상을 살아가! 면서 가장 힘든 것은 고됨이 아니라 헛됨이다. 제일 힘든 것은 자기가 하는 일이 열매를 맺지 못하고 헛수고를 했구나 하고 느낄 때다. 세상 모든 일들은 언제나 가변적이다. 그래서 항상 다르다. 특히 어떤 상황에 의존하다보면 항상 마음이 흔들 수밖에 없다.
지금 당장은 모든 상황이 좋아서 안도 하지만 속으로는 계속해서 불안감에 빠져 있다. 다시 안 좋아지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서 늘 걱정에 쌓여 있다. 그러나 지킬 것이 있는 사람은 상황에 관계없이 변함이 없고 초지일관 자신의 길을 걸어간다. 지킬 것이 있는 사람은 위축되지도, 날 뛰지도 않고, 싸우려 들지도 않는다.
또 진취적인 기상으로 매사 도전의식을 갖고 자신감에 차 있다. 그러나 지킬 것이 없는 사람은 늘 죽을까봐 걱정하면서 연명하는 삶을 산다. 그리고 궁지에 몰린 타조가 모래밭에 머리를 묻는 것처럼 부끄러운 행동을 한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누구나 깨달아서 부처가 될 가능성을 99%를 가지고 있다고 불가에서는 말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부처가 될 수 없는 것은 생각이 중생이기 때문이란다. 다시 말해 나(自我)를 앞세우는 삼독(三毒)의 마음이 꽉 들어차 있으니 부처이면서도 부처란 것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불가에서 말하는 삼독이란 가장 근본적인 세 가지 번뇌,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인 탐진치貪瞋癡를 이르는 말이다.
요즘 들어 국회의원들이 미디어법 제정을 놓고 의장석을 점거 하고 또 자신들의 뜻이 관철되지 않는다고 의원직을 내놓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진정 자신들이 목숨을 바쳐 지켜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에서 의원직을 내놓는 것이라면 존경의 마음이 되겠지만 민초들의 눈에는 그렇게 비춰지지 않아서 유감이다.
민주당을 비롯한 야 3당은 이번 문제와 관련, 자신들이 말한 책임을 지어야 한다. 더 이상 순박한 백성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국민을 내세우며 기만해서는 안 된다. 그 약속을 지킬 자신이 없으면 더 이상 의원직 사퇴를 무기로 삼지 말아야 한다. 여.야를 믹론하고 추태다.
또 새총까지 만들어 경찰에게 흉기인 납덩이를 쏘아대며 공장을 점령하고 농성을 하는 쌍룡 노조원들도 마찬가지다. 야당의원들이나 쌍룡 노조원들. 과연 그렇게까지 하면서 꼭 지켜야 할 것인지를 좀 더 신중한 마음으로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그런 극한 상황에서 그들의 행동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눈앞의 작은 것에 집착한 나머지 큰 것을 잃어서야 되겠는가.
바라기는 그 누구보다도 대통령은 물론 정치인들과 강경투쟁을 하는 노조 단체. 우리 사회가 진정으로 무엇을 바라고 원하며 무엇을 지켜주기를 바라는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그 무엇보다도 민초들의 숨소리가 나직하게 들리면서 외치는 간절한 소리를 귀 기우려 들을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나왔고 다른 사람들을 의지하며 살아가고 원하든, 원치 않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 살아가는 때는 한 순간도 없다.
그래서 우리의 행복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삶이 그런 것이지 아무도 우리의 적은 아니다. 긍정과 부정은 항상 존재 한다. 중요한 것은 내 자신이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달렸다. 부정적인 사고를 택하면 긍정적인 사고마저 잃는다. 그러나 긍정적인 경우는 자신은 물론 타인에게까지 희망을 얻게 한다.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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