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동현-“실력만이 살 길” 외친 큰어른 … 도산 안창호 흥사단 창립하다


동문기고 허동현-“실력만이 살 길” 외친 큰어른 … 도산 안창호 흥사단 창립하다

작성일 2009-05-21

[그때 오늘] “실력만이 살 길” 외친 큰어른 … 도산 안창호 흥사단 창립하다

- 허동현 /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
 
 “다른 나라가 마음대로 우리 강토에 들어와서 설치는 것은 우리가 힘이 없는 까닭이다.” 고향 평양에서 벌어진 청일전쟁을 보고 17세 청년 안창호(1878~1938)는 개탄했다. 두 해 뒤 평양에서 열린 만민공동회에서 민초들에게 깨어나라 목 놓아 소리쳤건만, 그의 외침은 대한제국의 탄압으로 대답 없는 메아리가 되어 버렸다. 24세 되던 1902년 미국 유학 길에 나섰다. 그러나 미주동포들의 곤고한 삶을 목도한 그는 일신을 위한 공부에 매진할 수 없었다. 이듬해 학업을 중단한 뒤 대한친목회와 공립협회 등을 이끌며 동포들이 근대 시민으로 진화하길 바랐다. 조국의 명운이 바람 앞의 등불마냥 위태롭던 1907년 그는 다시 돌아왔다. 그때 그는 ‘실력 양성’, 개개인의 힘 기르기가 느리지만 민족의 살길을 일굴 지름길이라고 외쳤다. “지금 세계가 민족경쟁시대라. 독립한 국가가 없고는 민족이 서지 못하고 개인도 있지 못한다. 국민 개개인이 각성하여 큰 힘을 내지 아니하고는 조국의 독립을 유지할 수 없다”고 말이다. 그는 신민회를 만들어 ‘신민(新民)’, 즉 국민들이 주인 되는 국민국가 만들기에 나섰다.

그의 소망이 물거품이 되어 버린 1910년. 이 땅의 사람들은 제국 일본의 식민지 국민이자 천황의 신민(臣民)으로 굴러 떨어졌다.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는 거국가(去國歌)를 남기고 미국으로 떠난 그는 1913년 5월 1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민족독립의 토대가 될 근대적 개인을 길러낼 단체로 흥사단을 세웠다. 그는 개개인의 자각에 바탕을 둔 근대 시민을 만들어내되 이를 단체수련을 통해 이루려 했다. 그의 가르침은 구두선이 아니었다. “오렌지 한 개라도 정성껏 따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것이다.” 그는 말로만 하는 위로부터의 일방적인 교화를 말하지 않았다. 1912년 미국 리버사이드 농장에서 오렌지를 따 담는 모습(사진=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제공)은 그가 민초들과 함께 동고동락한 희유(稀有)의 지도자였음을 잘 말해준다.

상해임시정부를 이끈 지도자들이 독립운동 전략을 둘러싸고 서로 반목할 때 그는 일갈했다. “우리나라가 독립이 못 되는 것이, ‘아아 나 때문이로구나’ 하고 가슴을 두드리고 아프게 뉘우칠 생각은 왜 못하고, 어찌하여 그 놈이 죽일 놈이요, 저 놈이 죽일 놈이라고만 하고 가만히 앉아 계시오. 내가 죽일 놈이라고 왜 못 깨달으시오.” 남 탓만 하는 우리 위정자들을 꾸짖어 줄 큰 어른이 그리운 오늘이다.

[[2009-0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