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동현 - “아들아, 아비 없다고 슬퍼 마라” 상하이 의거 결행하는 윤봉길


동문기고 허동현 - “아들아, 아비 없다고 슬퍼 마라” 상하이 의거 결행하는 윤봉길

작성일 2009-05-04

[그때 오늘] “아들아, 아비 없다고 슬퍼 마라” 상하이 의거 결행하는 윤봉길

- 허동현 /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
 
“나는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합니다.” 1932년 4월 27일 안중근의 동생 안공근의 집에서 25세 피 끓는 청년 윤봉길은 각오를 다졌다. 이틀 뒤인 29일 훙커우 공원 전승기념식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석 달 앞선 1월 8일 도쿄에서 이봉창은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한 맹세”를 이루지 못했다. “불행히도 명중하지 못했다(不幸不中).” 그의 실패를 못내 아쉬워한 중국 신문의 보도를 빌미로 일본군은 상하이를 침략하였다. 민간인 거주지를 무차별 폭격해 얻어낸 승리를 일제가 자랑하던 치욕의 그날. 침략의 수뇌부를 겨눈 윤봉길의 물병 폭탄은 치 떨리는 중국 사람들의 분노를 달래주었다. 얼마 전 만주에서 농업용 수로 문제로 불거진 중국과 조선 사람 사이의 갈등은 봄눈 녹듯 사라졌다. “중국의 백만 군대가 하지 못하는 것을 한국의 한 의사(義士)가 능히 했으니 장하다.” 장제스(蔣介石)는 윤봉길의 의거를 보고 우리의 독립운동을 돕는 데 발 벗고 나섰다. 우리 청년들이 중국의 군관학교에서 정규 군사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렸으며, 1940년에는 광복군이 창군되기에 이르렀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본격적으로 대륙침략에 나선 일제에 맞서 한·중 공동항쟁의 길을 찾은 김구의 구상은 윤봉길의 희생을 딛고 열매를 맺었다.

“나의 철권으로 적을 즉각 부수려는 각오”를 다지며 상하이로 떠나기 전 찍은 23세 청년 윤봉길(사진)의 지르문 입술은 그의 결의가 얼마나 굳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그 역시 젖먹이 아들의 앞날을 염려하는 아비였다. 두 아들에게 남긴 유시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는 읽는 이의 마음에 감동을 자아낸다.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 술을 부어 놓으라/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마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한 이를/ 동서양 역사로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자가 있고/ 서양으로 프랑스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에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민족의 미래를 위한 제단에 자신을 초개같이 던진 이들의 희생을 딛고 오늘 우리가 여기에 서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터이다.

[[중앙일보 2009-0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