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호-입법은 지구전이다


동문기고 임성호-입법은 지구전이다

작성일 2009-04-23

[시론] 입법은 지구전이다

- 임성호 /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

원하는 바를 빨리 이루려는 조급함은 결국 복잡한 현실 앞에서 좌절하기 쉽다. 그 좌절이 자기반성의 기회가 되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남 탓하기로 이어지면 비극이다. 오늘날 각종 정책현안에 대한 입법을 놓고 행정부·입법부·언론 공히 조급증에 빠져 있다. 이 조급증은 입법 과정이 기대만큼 순탄히 진행되지 않을 때 남을 탓하고 욕하는 과도한 적대심을 낳는다. 입법의 근본적 어려움을 간과한 것에 대해 반성하기보다는, 자기 입장을 들어주지 않는 상대방만 원망할 경우 갈등이 증폭되며 상황은 더 꼬인다.

행정부 측은 당정협의를 거친 정책이 여당 내에서 제동 걸린다고 불만을 표한다. 여당은 행정부가 당 입장을 경시하고 멋대로 정책을 밀어붙인다고 비판한다. 야당은 소수 의견을 아예 묵살한다고 여당과 행정부를 싸잡아 비난한다. 언론은 입법 과정상 이견이 발생하면 혼선, 엇박자, 심지어 위기 등 부정적 언어로 고발하듯이 보도한다.

조급증에 기인한 이러한 비난 공방은 요즘 주요 현안마다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다주택자 양도세 중과를 폐지할지, 강남 3구의 부동산 규제를 완화할지, 로스쿨 출신만 변호사 시험을 볼 수 있게 할지, 비정규직 전환 기간 2년을 4년으로 늘릴지, 주공과 토공을 통합할지, 대기업의 은행 지분 비율을 늘릴지 등을 놓고 조급증에 걸린 측들 간에 비난전이 거세다.

대의민주주의 원칙을 생각한다면 입법 조급증은 정당화될 수 없다. 법집행기관인 행정부가 당정 협조라는 이름으로 입법기관인 국회와 여당에 피동적 정책수용을 요구할 수는 없다. 행정부가 법안을 국회에 제출하기도 전에 특정 정책이 벌써 통과되기라도 한 듯이 국민에게 홍보할 수 있겠는가. 여당 지도부가 야당은 물론 당 소속 의원들과도 협의하지 않고 행정부와 폐쇄적으로 결정해 강행할 수 있겠는가. 야당 지도부도 여당과 행정부 측 의견에 귀 막고 일방적 당론을 경직되게 사수할 수 있겠는가. 대의민주주의 원칙에 충실한 입법과정은 수많은 이견이 부딪치는 가운데 수많은 난관을 간신히 넘으며(때론 못 넘으며) 천천히 나아갈 뿐이다.

원칙에 더해 오늘의 현실은 입법이 결코 속도전이 될 수 없게 하고 있다. 사회가 고도로 복잡해지는 가운데 사회이익은 파편화되고 대중은 원자화되고 있다. 단순한 이분법적 여야 대립 구도가 상존하기보다는, 정책현안별로 다양한 이해관계와 모호한 세력연대, 유동적 정책연합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행정부와 여당 지도부 간의 협의로 입법이 신속히 추진될 수 있을까. 여야 공히 집단주의적 정당기율로써 입법과정을 강력히 추동해갈 수 있을까.

관련자 사이에 공감대가 형성돼 척척 입법이 이뤄지는 것은 이제 꿈이다. 70년도 더 된 과거의 일인 루스벨트의 뉴딜도 시시비비와 우여곡절을 겪어 추진됐다. 민주주의는 이견과 갈등을 당연시하므로 시끄럽고 혼란스럽고 결론을 쉽게 내지 못한다. 그래서 입법 조급증 환자에겐 민주주의가 짜증스럽고 남에 대한 적대심만 크게 한다.

민주주의와 입법 조급증이 이처럼 같이 어울릴 수 없다면 무엇을 택할까. 신속한 입법이 민주주의보다도 우월하고, 정의 같은 고매한 가치를 가져올 것 같지 않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에 우선순위를 두고 입법 조급증을 버려야 한다. 당위적 명분은 차치하고 실리적 이해로만 봐도, 입법은 온갖 함정·복병을 넘으며 때론 후퇴하거나 우회하고 전략적 휴전도 하는 지구전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당정 협조나 여야 합의가 잘 안 된다고 서로 탓하며 상황을 악화시키는 경우가 줄어들 것이다. 일방적이고 성급한 정책발표와 조급한 고발 보도로 국민마저 조급증-실망감-적대심의 악순환에 빠뜨리는 일도 줄 것이다.

[[중앙일보 20009-04-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