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실-혈우병 환자, 의료 관행 탓 두 번 운다


동문기고 박영실-혈우병 환자, 의료 관행 탓 두 번 운다

작성일 2009-04-21

[내 생각은…] 혈우병 환자, 의료 관행 탓 두 번 운다

- 박영실 / 경희대 교수· 동서신의학병원 -

17일은 혈우인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촉진시키기 위해 세계혈우연맹(WFH)이 지정한 세계 혈우병의 날 20주년이다. 중·고교 생물시간에 혈우병에 대해 배운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혈우병이 유전 질환이라는 것과 상처가 생겨서 피가 나면 지혈이 되지 않는 병 정도로만 알고 있다. 혈우병은 관절이나 근육 등 몸속에도 출혈이 발생하며, 몸속 출혈은 쉽게 멈추지 않는다. 계속적인 출혈은 결국 장애를 일으킨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일단 체내 출혈이 발생하면 합병증이 나타나는 것이다. 또 혈우병의 30%는 유전 성향 없이도 일어날 수 있다.

혈우병 환자 중 절반 이상은 혈액 내 응고 인자가 일반인의 1% 미만에 속하는 중증 환자인데, 이들 대부분은 관절 내 출혈로 인한 혈우병성 관절염이라는 심각한 합병증을 앓고 있다. 걸으면 체중의 압력이 다리 관절에 가해지면서 무릎·발목 그리고 허벅지 관절에서 출혈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반복적인 관절 내 출혈로 연골이 손상되면, 초기에는 다리를 잘 구부릴 수 없다가 심한 경우에는 외과적 수술까지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 하지만 지혈이 잘 되지 않는 혈우병 환자의 특성상 수술 자체에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이러한 심각한 합병증을 조기에 방지할 수 있는 방법은 있다. 출혈 발생 후에 치료제를 처방 받는 기존 방법과 달리 정기적으로 응고제를 투여해 체내에 일정 농도의 혈액 응고 인자를 유지시키는 응고 인자 유지 요법(Prophylaxis)을 시행하는 것이다. 하지만 건강보험 혜택에 한계가 있어 심각한 합병증 치료에 어려움이 많다. 혈우병 환자의 약 80%가 응고 인자가 정상의 1% 미만~5% 이하에 속하는 중증 또는 중등도 환자다. 이러한 환자에게 출혈 발생 후 일괄적인 약 처방 제한으로 치료제를 처방 받는 방법으로는 심각한 합병증 조기 치료에 역부족이다. 또한 매달 3회 의료기관을 방문해 10회분 또는 7회분의 약을 처방받게 하는 제한 기준을 가진 국가는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최근 치료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감염 가능성을 완벽히 제거한 유전자재조합 혈우병 치료제가 출시될 정도로 혈우병 치료법은 발전됐다. 그러나 처방의 한계로 합병증을 앓고 있는 혈우인들의 삶의 질 저하는 아직도 심각한 상태다.

혈우병은 조기부터 지속적인 치료를 받는다면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병이다. 인슐린이 모자라는 당뇨병처럼 모자라는 부분을 보충하면 합병증 발생 빈도를 줄이고 정상적인 사회 생활을 누릴 수 있다. 우리 사회가 혈우인들의 의미 있는 삶을 위해 힘을 실어 줄 차례다. 정부가 혈우병 치료에 조금 더 전향적으로 나선다면 장기적으로는 보험재정 지출 감소와 사회적 비용 감소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중앙일보 2009-04-18]]